굴은 우리 나라 신석기시대의 생활인들이 쉽게 채집할 수 있었던 식량 중의 하나로 그 때의 생활유적인 조개더미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굴은 그 뒤에도 우리 민족의 중요한 식품으로 애용되어 왔다.
고려시대의 가요인 「청산별곡(靑山別曲)」 중 “살어리 살어리랏다, 바라래 살어리랏다. 나마자기[海草] 구조개(굴과 조개)랑 먹고, 바라래 살어리랏다.”라는 구절은, 굴이 당시 서민들에게 접근하기 쉬웠던 식품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조선조 중엽에 허균(許筠)이 쓴 『도문대작(屠門大嚼)』에 동해에서 나는 큰 굴을 둥근굴[輪花]이라고 하여 맛이 달다고 하였으며, 함경도 고원과 문천에서 나는 굴은 매우 크나 맛은 서해 것만 못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굴을 먹는 방법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대개 날로 먹었고, 굴로 밥을 지어 먹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즉, 조선시대의 음식관계를 다룬 『음식디미방』·『규합총서(閨閤叢書)』·『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등에는 굴을 날로 먹는 방법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 굴밥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요록(要錄)』에는 굴로 죽을 끓인 석화죽법(石花粥法)이 기록되어 있어 굴로도 밥을 지어 먹었을 것이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요사이에는 서울·경기지방에서 별식으로 즐겨 먹고 있다. 굴밥은 먼저 쌀을 씻어 안쳐 한소끔 끓을 때 생굴을 넣어 뜸을 들인다. 쌀밥에는 없는 철·구리·칼슘 등의 무기질과 비타민 A가 풍부하여 영양적으로 우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