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개옥(皆玉), 호는 남곡(南谷). 할아버지는 증 이조판서 권위(權偉)이고, 아버지는 호조판서 권대재(權大載)이며, 어머니는 정랑 이진(李溍)의 딸이다.
1665년(현종 6)에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부정자(弘文館副正字)로 처음 벼슬길에 오른 뒤, 1670년 성균관박사 겸 봉상시직장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예조 · 병조좌랑을 거쳐, 1672년 정언 · 지평, 전라도도사를 지냈다. 1674년 고부사(告訃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같은 해 정언이 되었다.
1675년 경상도에 암행어사로 나가 문경현감 정문용(鄭文瑢), 청도군수 권일(權佾), 금산군수 윤이익(尹以益) 등 선치수령(善治守令)에게 표리(表裏: 恩賜나 헌상하는 옷감)를 하사할 것을 진언하였다. 같은 해 홍문록(弘文錄)에 올랐으며 지평 · 헌납을 역임했고, 선비 황식이 소를 올려 추천한 7현(賢)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들어갔다.
1676년 9월 현종의 묘정 배향을 변경하는 논의에서 집의로서의 처신을 훌륭히 해냈다. 1679년 판중추부사 허목(許穆)이 영의정 허적(許積)의 아들 허견(許堅)의 불법한 행위를 공격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청남(淸南) · 탁남(濁南)의 당파 싸움이 벌어졌다. 그때 도승지 민암(閔黯)이 청남인 허목의 당으로 몰아, 아버지는 광주로, 권해는 청도로 귀양갔다. 이듬해 다시 창성으로 이배되었다.
1686년(숙종 12) 또 다시 언양(彦陽)으로 이배되어 이곳에서 『춘추인씨지(春秋人氏志)』를 저술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대사간에 복관되어 대사성 · 강화유수 · 대사헌 · 부제학 · 승지 · 경기도관찰사 ·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했고, 다시 대사헌 · 형조참의를 거쳐 호조참의에 이르렀다. 1694년 갑술환국 때 창성에 위리안치되었다가, 1697년에 석방되어 예안에서 여생을 보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고, 평양부윤으로 재임할 때는 평안북도 영변의 보현사 영암대사석종비(普賢寺靈巖大師石鐘碑)의 비문을 짓고 썼다. 저서로는 『노론주해(魯論註解)』 · 『사범삼십오편(士範三十五編)』 · 『의경변의(義經辨疑)』 · 『남곡집(南谷集)』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