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책(68장). 필사본. 표제는 ‘금강유산기(金剛遊山記)’라고 한자로만 기록되어 있다. 첫번째로 실려 있는 글의 제목은 ‘금강유산일긔’이며 국문으로만 되어 있다.
이 작품은 『금강유산기』의 제1면에서 제54면까지의 분량을 차지하는데, 셋째장 한 장이 떨어져나가 출발 후 3∼5일의 사흘간 기사가 없다.
『금강유산기』에는 「금강유산일긔」 이외에 「홍션뎐(洪仙傳)」·「유여매쟁춘(柳與梅爭春)」·「오화뎐(五花傳)」·「안빙몽유록(安憑夢遊錄)」·「녀용국평난기(女容國平亂記)」·「ᄇᆡᆨ화국뎐(百花國傳)」·「ᄇᆡᆨ화국ᄌᆡ설듕흥녹(百花國再設中興錄)」 등의 산문이 실려 있다.
8편의 산문 이외에 「요디가(瑤池歌)」·「시됴(時調)」·「ᄒᆡ유록(海遊錄)」·「슈양가(首陽歌)」·「시됴(時調)」·「사시풍경(四時風景)」·「시됴(時調)」·「한시(漢詩)」 등 8편의 시가까지 총 16종이 실려 있다.
지은이의 성명은 알 수 없으나, 당시 통천군수(通川郡守)의 책방도령으로 동생 상연이 있으며, 선조는 「유산록(遊山錄)」이라는 한문본 금강산 기행록의 저자인 창주공(滄洲公)이다.
지어진 연대는 금강산 유람을 출발한 날이 을미년 추 9월 초 8일 신해(辛亥)인데, 삭윤표(朔閏表)에 의하면 조선시대 숙종 이후 고종 말엽까지 을미년 추 9월 초 8일이 신해인 해는 없다. 또 추 9월 8일이 신해인 해는 을미년이 아니므로 태세(太歲)나 일진(日辰) 중의 어느 쪽에 잘못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내용 중에서 9월 19일자의 “수일 전에 양주목사 이진검이 구경와서 신을 신고 화룡담가에 다니다가 미끄러져 운운”한 것이나, 기타의 여러 사실로 미루어보면, 을미(乙未)라는 태세는 맞고, 일진이 잘못 기록된 듯하다.
이진검(李眞儉)이 양주목사(楊州牧使)로 부임한 것은 1714년(숙종 40) 2월(음력)이기 때문에 이 작품의 ‘을미’는 1715년임이 분명하다.
이 작품에는 을미 추 9월 신해일에 친우 구문식과 함께 통천을 떠나서 두백촌을 경유하여, 업경대(業鏡臺)-영원암(靈源庵)-금사굴(金沙窟)-지장암(地藏庵)-백화암-(白華庵)-표훈사(表訓寺)-정양사(正陽寺)-헐성루(歇星樓)-만폭동(萬瀑洞)-수선암(修善庵)-구룡폭(九龍瀑)-보덕굴(普德窟)-마하연(摩訶衍)-중향성(衆香城)-불지암(佛地庵)-백운대(白雲臺) 불정대(佛頂臺)-외원통(外圓通)-유점사(楡岾寺)-송라암(松蘿庵)-삼일포(三日浦)-신계사(神溪寺)-옥류동(玉流洞)에 이르는 여행길이 소상히 적혀있다.
뿐만 아니라, 관유(觀遊)한 느낌과 견문을 유창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하였다. 이 작품의 을미가 1715년이 틀림없다면, 현재까지 학계에 보고된 자료 중에서 국문으로 지어진 최초의 금강산 기행록이라는 문학사적 가치가 있다. 최승범(崔勝範)이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