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부터 시작하여 고려ㆍ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널리 행하여졌다. 이 도량의 의식절차는 따로 있지 않고 금광명경도량(金光明經道場)ㆍ소재도량(消災道場)ㆍ신중도량(神衆道場) 등의 의식절차에서 비 오기를 기원하는 형식을 취한다.
특히, 『해룡왕경(海龍王經)』ㆍ『대운륜청우경(大雲輪淸雨經)』 등을 근거하여 행해진 용왕도량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 도량은 예종 때만 하더라도 1106년 6월법운사(法雲寺)에서, 1107년 5월과 1112년 5월 및 1121년 5월에 흥국사에서 개최되었으며, 1121년 윤5월에는 왕사 덕연(德緣)을 왕궁으로 초빙하여 비 오기를 빌었다.
1173년 4월에도 명종을 비롯하여 고관대작들이 보제사(普濟寺)에서 용왕도량을 열고 비 오기를 기원하였다. 그 해 1월부터 비가 오지 않아 냇물과 우물이 말라붙고 전염병이 만연하였으며, 굶주리는 자가 속출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고기를 팔고 사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금광명경도량을 열어서 비 오기를 기원한 것은 1041년(고려 정종 7) 5월과 1048년 8월, 1083년(순종 1) 10월, 1085년 5월 등을 들 수 있으며, 이 가운데 1085년 5월에는 건덕전(乾德殿)에서 7일간에 걸쳐서 개최되었다.
기우도량은 가뭄이 있으면 수시로 열었지만, 한 번 열어서 효험이 없으면 의식절차를 바꾸어서 신중도량 또는 소재도량 등으로 행하기도 하였다. 이 도량은 한 사찰에서만 행하는 경우와 전국의 모든 사찰에 명하여 행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기우도량과 아울러 기우를 목적으로 하는 가구경행(街衢經行)도 행하여졌다.
조선시대에는 국가가 주관하는 기우도량은 쇠퇴하였으나 마을 단위로 사찰에서 많이 행하였으며, 오늘날에도 사찰에서는 전통적인 관습에 의해서 기우도량을 열고 있다. 이때는 괘불(掛佛)을 내걸고 야외에서 『운우경(雲雨經)』을 외우면서 용왕권공(龍王勸供)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