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해(古殿奚)라고도 한다. 반피국이 백제의 기문(己汶 :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南原 )지역을 공격하여 점령하자, 513년(무령왕 13) 6월에 백제는 장군 저미문귀(姐彌文貴) 등을 왜(倭)에 보내 기문지역의 영유권문제에 대한 중재를 요청했다.
그리하여 같은 해 11월 백제가 반환을 제기한 기문과 대사(帶沙 혹은 滯沙 : 지금의 경상남도 河東)지역의 영유권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사국인 반피국을 대표해서 백제 · 신라 · 안라(安羅) 등의 사신과 함께 왜의 왕정(王廷)에 참석하였다.
이같은 섬진강유역을 둘러싼 영유권분쟁은 반피국이 실력대결에서 백제에게 패함에 따라 백제의 소유로 귀결되었다. 그 뒤 신라의 낙동강유역 진출이 본격화됨에 따라, 가야연맹이 붕괴일로에 놓이게 된 541년(성왕 11) 4월에 그는 상수위(上首位)의 관직으로 반피국을 대표하여 백제에 파견되었다.
이때 백제 성왕은 안라를 비롯한 가야연맹의 수장층들과 함께 가야연맹재건회의를 주재하였다. 544년 11월에도 안라의 하한기(下旱岐)를 비롯한 가야연맹의 수장층들과 함께 백제에서 가야연맹의 재건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는 가야연맹과 연고가 깊은 백제의 힘을 빌려 신라의 세력확대를 막으려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