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원 묘 출토 의복 일괄 ( )

김덕원 묘 출토 의복 일괄 중 회장저고리
김덕원 묘 출토 의복 일괄 중 회장저고리
의생활
유물
국가유산
1972년 서울에 소재한 조선 후기의 문신 김덕원(金德遠)과 그의 부인 전주이씨의 합장묘에서 출토된 17세기 후반의 복식류 53점.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김덕원묘 출토 의복 일괄(金德遠墓 出土 衣服 一括)
분류
유물/생활공예/복식공예/의복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보물(1980년 08월 23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강서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김덕원 묘 출토 의복 일괄은 조선 후기의 문신 김덕원의 묘에서 출토된 17세기 후반의 복식류 53점이다. 1980년에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후손이 소장하고 있다. 좌의정을 지낸 김덕원(1634~1704)과 그의 부인 전주이씨의 합장묘에서 의복이 출토되었다. 출토 의복은 단령, 철릭, 창의, 중치막, 바지, 장옷, 저고리, 치마, 웃치마, 여자 속바지 등이다. 옷의 본래 색상은 없어지고 갈변된 상태이다. 이 출토 의복은 염습의와 염습 제구이다. 이는 조선 숙종 때 사대부가의 복식 형태 등 당시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정의
1972년 서울에 소재한 조선 후기의 문신 김덕원(金德遠)과 그의 부인 전주이씨의 합장묘에서 출토된 17세기 후반의 복식류 53점.
개설

198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김덕원 묘 출토 의복은 1972년 3월서울특별시 영등포구 화곡동에서 조선 후기의 문신인 김덕원(1634∼1704)과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전주이씨의 묘를 이장 하던 중 출토된 유물 53점이다. 김덕원은 원주김씨로서 1662년(현종 3)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형조판서와 예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을 지냈으며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전력도 있다. 부인 전주이씨는 능산군(綾山君) 이희(李僖)의 딸이다. 출토된 유물은 상복겉[常服表] 1점과 상복안[裏] 1점( 단령 1점에 해당한다), 철릭 1점, 창의류 12점 창의 2점, [중치막 8점, 소창의 2점], 답호 1점, 반수의 1점, 바지 1점, 그 외 토수 1쌍, 광대(廣帶) 2점, 복건 1점, 명목(暝目) 1점, 이불류 5점, 기타 옷조각 일부 4점 등이 나왔다. 전주이씨의 묘에서는 장옷 8점, 저고리 18점, 치마 6점, 웃치마 1점, 여자속옷 1점 등 53점이 출토되었다. 1980년 8월 23일에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후손 김재호씨 댁에서 소장하고 있다.

특징

김덕원 묘 출토 의복은 김덕원의 복식과 부인 전주이씨의 복식으로 나누어져 소개되고 있으나 합장묘를 이장했을 때 전문가의 도움 없이 후손에 의해 작업이 이루어져 복식이 섞여서 수습된 아쉬움이 있다. 유물 지정 당시 남자 복식으로 추정되는 것은 김덕원 복식, 여자의 것은 전주이씨 복식으로 소개되었다. 이는 오류를 가져올 수 있는 사항으로 실제로 여자의 것으로 소개된 웃치마는 남자옷인 조복(朝服) 아래에 받쳐 입는 훈상(纁裳)과 형태가 비슷하여 판단에 주의가 요구된다. 출토품이기 때문에 옷의 본래 색상이 없어지고 갈변된 상태이다.

단령은 1점이 출토되었는데, 형태로 보아 17세기 후반의 겹단령 양식으로 확인되었다. 지정 당시에는 상복(常服) 겉[表], 상복 안[裏]으로 명명되어 2점의 상복으로 소개되었다. 단령의 형태는 둥근 깃이 가장 큰 특징이고 긴소매가 달렸으며 트인 옆선에 무가 달린 옷이다. 깃 너비나 깊이, 고름 양식과 크기, 무의 접힌 상태 등이 단령 유물의 시대를 판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출토된 단령은 단령깃의 겉감과 직령깃의 안감을 각각 따로 제작하여 서로 끼운 후 깃과 도련, 무를 부분적으로 바느질하여 1벌로 만든 옷으로 이때 겉과 안의 시접은 모두 몸쪽으로 향하고 무는 뒷길로 젖혀져 상부 무 머리쪽을 뒷길에 부착하였다. 소매 너비 66.5㎝, 단령깃 너비 5.2㎝로 전형적인 17세기 후반 양식이다. 겉감은 구름과 칠보 무늬의 운보문단(雲寶文緞)이다. 소매 끝에 직사각형 문장이 2개 직성되어 있는데 제직한 곳을 명시한 것으로 추정된다. 안감은 보문이 생략된 운문단(雲文緞)이다. 뒷길이 130㎝, 뒤품 66㎝, 화장 114㎝이다. 가슴에는 가로 세로 35㎝ 크기의 공작 흉배가 부착되었는데, 겉감과 같은 운보문단 바탕에 파도가 부딪히는 바위 위에 공작 한 마리가 구름 위로 날고 있는 문양을 수놓았다.

철릭은 1점이 있다. 철릭은 고려시대에 원나라로부터 받아들인 옷으로 ‘첩리(帖裏)’, ‘천익(天翼)’ 등으로도 불린다. 곧은 깃에 상의와 하의용 치마가 연결된 남자의 옷으로 문무백관의 융복으로 입혀졌다. 상의와 하의의 길이 비례와 소매 형태, 고름 유형 등을 통해 그 유물의 연대를 파악할 수 있다. 유물은 칠보운문단(七寶雲文緞)으로 만든 홑철릭이다. 뒷길이 130㎝(상의 45.5㎝, 하상 84㎝), 화장 124㎝이며 소매너비는 61㎝이다. 허리선 아래 양쪽이 트여 있다.

창의류(氅衣類)로 명명된 12점은 그동안의 복식학계의 연구 성과로 각 형태에 따른 올바른 명칭이 확인되어 수정이 요구되는 자료이다. 현재 복식학계에서 통용되는 이론을 바탕으로 분류하고자 한다. 창의 2점, 중치막 8점, 소창의 2점이 있다.

창의(氅衣) 2점은 모두 겹옷이다. 창의는 임진왜란 이후 입게 된 남자용 포로서, ‘대창의(大昌衣)’라고도 하였다. 곧은 깃에 소매가 넓고 뒷중심선 허리 아래로 긴 뒤트임이 특징이다. 유물은 1점은 명주 겹창의, 1점은 공단 겹창의이다. 뒷길이 127∼128㎝, 뒤품 54∼56㎝, 화장 121∼122㎝ 정도이다. 소매는 너비 50㎝로 넓고, 뒷길에 78㎝ 정도의 뒤트임이 있다.

중치막(中赤莫)은 8점이 있다. 중치막은 16세기의 기록 중에 그 명칭이 확인되고 유물도 가끔 출토되지만 조선 후기에 남자들이 가장 흔히 입었던 포이다. 곧은 깃에 옆트임이 있고 소매가 넓은 것이 특징이며 왼쪽 소매가 탈착형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유물은 명주겹중치막 2점, 명주 솜누비중치막 5점, 원형화문주(圓形花紋紬) 1점이다. 옷의 크기는 뒷길이 120㎝ 내외, 화장 120㎝ 내외, 뒤품 55㎝ 내외이며 누비옷의 경우 1∼2.5㎝ 간격을 누벼주었다. 깃은 곧은 칼깃 형이며 소매는 너비 50㎝ 내외로 넓고 겨드랑이 아래로 20㎝ 정도 내려와서 옆선이 트여 있다.

소창의(小氅衣)는 지정 당시 착수창의로 소개되었다. 중치막과 마찬가지로 양옆이 트인 세 자락의 옷이지만 소매가 좁은 것이 다른 점이다. 명주 옷감으로 누빔한 누비소창의 1점, 국화무늬가 있는 평직의 문주(紋紬) 겹소창의 1점이 있다. 소매 너비 25㎝ 정도의 착수형이며 겨드랑이 아래부터 옆이 트여 있다.

답호 1점은 마주보는 사각 깃에 동정이 달렸으며 소매가 없는 긴 조끼 형식이다. 겨드랑이 약 15㎝ 아래부터는 트여 있다. 답호는 조선 중기까지는 직령과 그 형태가 같으나 소매 길이가 짧은 옷이었는데 임진왜란 이후 그 형태가 사라지고 덧입는 간편한 포의 명칭으로만 남게 되어 전복(戰服) 명칭과 혼란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유물은 누비로 만든 것으로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양식이다.

반수의 1점은 위의 답호와 매우 비슷한 형태이나 반소매가 달려 있다. 겉감은 공단, 안감은 명주로 만들어 누빔한 누비옷이다. 깃은 앞목둘레를 완만한 곡선으로 하고 길에 각지게 놓여 있으며 X자형으로 곱게 박음질되어 있는 좌우 대칭형을 이루고 있다. 동정은 없고 깃 나래로 3개의 매듭단추가 달려 있으며 양옆이 허리 아래 20㎝부터 길게 트여 있다.

바지 1점은 누비사폭바지이다. 조선 전기의 남자 바지는 바지통이 넓은 단속곳 형태 여자의 바지와 같은 형태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바지 제도가 변화하여 지금 착용하고 있는 사폭바지가 등장하였다. 유물은 전형적인 임진왜란 이후의 사폭바지로서 겉과 안감 명주에 사이에 솜을 얇게 두고 약 3.5㎝ 간격으로 누빈 사폭바지이다.

장옷[長衣]은 8점이 있는데 7점이 누비이며, 1점은 솜장옷이다. 조선 전기부터 구한말까지 여성들이 계절에 관계없이 가장 많이 착용했던 포 종류인데 18세기 이후로는 머리에 쓰는 쓰개로도 사용되었다. 장옷의 형태는 두루마기와 비슷하지만 겉길 자락과 안길 자락이 좌우 대칭이며 좌우 길의 안쪽으로 들여 달린 목판깃이 특징이다. 그리고 좁은 소매의 끝에는 흰색 거들지가 달려 있으며 흔히 접어서 착용하였다. 유물은 운문단겹장옷, 공단겹장옷, 추사(趨絲: georgette, 경사 또는 위사를 강한 연사를 사용하여 신축성이 좋게 만든 옷감)로 만든 겹장옷, 만자문주(卍字紋紬)겹장옷, 능파문주(陵波紋紬)솜장옷 각기 1점씩과 명주누비장옷 3점이다. 깃, 고름, 겨드랑이의 소형삼각무가 짙은 자주색으로 된 것도 있으며 전체가 한 가지 색으로 된 것도 있다. 크기는 뒷길이 114∼122㎝, 뒤품 54∼60㎝, 화장 75㎝ 내외이며 누비장옷은 2∼3㎝ 간격으로 누빔하였다.

저고리 18점은 모두 여자용이다. 여자 저고리의 깃은 대략 목판깃에서 출발하여 17세기 전기가 되면 목판 당코깃이 출현한다. 후기로 가면서 목판 당코깃의 곡선화 경향도 점점 더 심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유물은 목판 당코깃에 깃 · 끝동 · 곁마기를 자주색으로 회장저고리 형과 아무런 장식이 없는 민저고리형이 있으며 옆선에 곁마기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함께 있으며 소매는 직선소매이다. 전형적인 17세기 후반의 여성 저고리 양식이다. 유물의 크기는 길이 41∼43.5㎝, 화장 69∼73㎝, 품 46㎝ 내외이며 옷감은 명주 · 아자문주 · 운문단 · 화문단 · 공단 등이 사용되었고, 솜 · 겹 · 겹누비 · 솜누비 등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치마는 6점으로 겹치마 · 솜치마가 있으며 명주 · 추사 등의 옷감을 사용하였다.

웃치마 1점은 공단으로 만든 것으로 홑옷이다. 옆선과 도련에 10㎝ 너비로 짙은 색의 선단이 둘러져 있다. 길이 96㎝, 폭 136㎝이며 허리부분을 넓게 주름주고 끈이 달린 허리 말기를 달아 고정하였다. 조복 상(裳)과 형태가 비슷하나 초기 발굴 상황을 알지 못하여 정확한 판단이 어려워 후속 연구를 기대해 본다.

여자속바지 1점이 있는데 바지통이 71㎝로 매우 넓고 밑단을 12.5㎝ 정도를 접은 접은단 바지이다. 명주안감과 겉감 사이에 솜을 둔 솜바지이다. 허리둘레 63㎝, 밑아래 길이 43㎝이다. 말기는 옆으로 트임이 있다.

기타로 토수 1쌍, 광대(廣帶)로 지정된 가슴허리띠[帶子] 2점, 복건 1점, 멱목[暝目] 1점, 이불류 5점과 옷 조각 일부 4점이 있다.

의의와 평가

김덕원묘 출토의복은 김덕원과 부인 전주이씨의 염습의(殮襲衣)와 염습제구(殮襲諸具)로서 조선 숙종 때 사대부가(士大夫家) 남녀 복식의 형태와 직물, 그리고 상례제도 등 그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당시 이장 작업이 전문가의 도움 없이 후손에 의해 이루어져 일부 유물의 오류가 있어 왔다. 사용자가 혼돈되거나 복식 명칭이 잘못된 경우 등이다. 그동안의 연구 성과로 일부 수정하여 바로 잡을 수 있었으나 좀 더 나은 후속 연구를 기대하여 본다.

참고문헌

『중요민속자료 조사보고서 제3집』(문화재청 편, 2007)
『조선시대 문관 흉배의 조형성에 관한 연구』(하명은, 안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4)
「출토복식-남복-」(류송옥, 『한국(韓國)의 복식(服飾)』, 한국문화재보호협회, 1982)
「출토복식-여복-」(고복남, 『한국(韓國)의 복식(服飾)』, 한국문화재보호협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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