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동학교도가 보은 장내에 모여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요구하며 집회를 가졌을 때 봉성(鳳城: 지금의 전라남도 구례) 대접주로 참가하였다. 그 뒤 금구의 접주로 활약하였는데 전라도의 북접(北接)이라고 불리었다.
1894년 동학운동 때도 전봉준(全琫準)과 함께 기포하지 않고 있다가,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명령에 따라 9월말 함열에서 오지영(吳知泳)과 함께 기병하였다. 남북접이 서로 심하게 반목하자 그 해소책을 논의하고, 오지영과 함께 전봉준과 최시형을 각각 방문하여 남북접의 화해를 성공시켰다.
전봉준 휘하의 남접군이 북상하자 그 틈을 타 강진 병영과 장흥의 관리들이 동학도를 토벌하기 시작하자 자진하여 동학군 3,000명을 이끌고 두 곳을 공격하였다. 동학군은 12월 3일 장흥성을 함락하고 장흥부사를 죽였다.
다음날에는 강진과 병영을 포위하니 강진현감 강영서(姜永瑞)와 병사 서병무(徐炳武)는 도망하였다. 점령 당시 강진성내의 가옥이 전소되고, 병영의 화약고가 폭발하였다.
그러나 곧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관군의 공격으로 동학군은 대패하여 군산 · 서천 방면으로 달아났다. 공주전투에서 패하여 후퇴하는 동학군을 만나자 일이 틀린 줄 알고 군사를 해산하고 전봉준 · 손화중(孫華仲) 등과 재기를 도모하다가 전라북도 순창 복흥산(福興山)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혼자만 특사되어 집으로 돌아오다가 전라감사 이도재(李道宰)에게 다시 잡혀 전주 장터에서 살해되었다. 동학관련판결선고서(東學關聯判決宣告書)에 의하면, 1895년 동학당에 투신하여 지방안녕을 해한다는 이유로 심문받았으나 무죄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