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고종 31) 전봉준(全琫準)이 동학운동을 일으키자 금구(金溝)에서 2,000여 명을 데리고 장령급(將領級)으로 가담하였다. 재지가 비상하고 검술이 뛰어났다.
전주화약(全州和約) 이후에 운봉(雲峰) 등 3읍을 장악하기 위해서 태인·임실·금구의 동학군 3,000명을 이끌고 운봉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박문달(朴文達)이 돌을 쌓고 저항하였으나 끝내 성을 함락시키고 집강소(執綱所)를 설치, 서정(庶政)을 처리하였다.
공주패전 뒤에 엿장수로 변장하고 서울에 올라가 서양인의 교회에 은신하였다. 1904년 일진회의 창립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 뒤 천도교에 들어가 1920년 초 천도교의 혁신문제를 둘러싸고 혁신파와 복구파가 심각하게 대립할 때 오지영(吳知泳)과 함께 혁신파의 처지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