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함평 출신으로, 전라남도 영광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23년 작은아버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철(金澈)을 따라 상해로 건너갔다. 1928년 상해에 있는 영국계 중학교 퍼블릭스쿨을 졸업하고, 1930년 상해법정대학 정치과에 입학하였다.
같은 해 학생 신분으로 대한교민단의경대(大韓僑民團義警隊)의 간부가 되었다. 1931년 박창세(朴昌世)·이수봉(李秀峰) 등과 상해전기회사에 적을 둔 동지들을 중심으로 교포들의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한 상해한인정위단(上海韓人正衛團)을 조직하고,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와 협력하여 친일주구들을 숙청하였다. 이어 한중민족항일대동맹의 선전부장이 되었다.
1932년 1월 서재현(徐載賢)·유상근(柳相根, 또는 兪相根) 등과 함께 상해한인독립운동자청년동맹을 개조하여, 한국독립당 청년부문 별동대로서 상해한인청년당을 조직하고 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3월 당원인 이덕주(李德柱, 異名 徐利均)·유진만(兪鎭萬, 異名 兪鎭軾)에게 조선총독을 암살하라는 임무를 주고 국내로 밀파하였다.
또 4월에는 최흥식(崔興植)·유상근에게 일본 관동군사령관과 일본에 있는 일본 육·해군대신을 암살하라며 대련(大連)으로 밀파하였다. 그런데 파견된 동지들이 모두 잡힘에 따라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되어 상해를 탈출, 같은 해 임시정부 외교부장 비서장이 되었다.
1933년 법정대학을 졸업하고, 남경에 본부를 둔 동방피압박민족연맹(東方被壓迫民族聯盟) 중앙위원이 되었다.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상해 훙커우공원[虹口公園] 투탄의거와 관련해 상해에서 일본 경찰에 잡혀 국내로 압송되었다. 1934년 광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고 항소, 같은 해 12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다가 법정에서 탈주하였다.
그러나 다시 잡혀 형이 가중, 1941년 11월까지 복역한 후 출옥하였다. 1942년 2월 예비검속으로 청주형무소에 구금되었으며, 1945년 1월 병보석으로 출감한 후 계속 광주대화숙(光州大和塾)에 연금된 상태에서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전라남도 건국준비위원회 광주청년대장을 역임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