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대동 출신. 1912년 평양 대성학교를 졸업했으며, 재학 중 안창호(安昌浩)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13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고용원이 되었으나 1915년 사직하고, 이후 회사 사무원을 거쳐 동아일보 평양지국장으로 근무하였다.
1920년 6월 김행일(金行一)·이제학(李濟鶴)·오현수(吳顯洙) 등과 대성학교 출신 학우들의 친목을 도모할 목적으로 대성학우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다. 이후 폐교된 대성학교를 살리기 위하여 모금, 강연회 개최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같은 해 8월에는 평양에서 조만식(曺晩植)·오윤선(吳胤善)·김동원(金東元) 등 70여 명과 함께 조선물산을 애용하자는 취지 아래 조선물산장려회를 발기하였다.
1922년 7월 평양에서 대성학교 출신인 김동원·김형식(金瀅植) 등과 흥사단(興士團) 계열 단체인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를 조직하였다. 1923년 1월 조선물산장려회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평양에 있는 각 종교, 사회단체를 모아 평양에서 조선물산장려를 위한 대대적인 선전행사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이후 조만식·김형식과 함께 실행위원이 되어 행사를 준비, 개최하여 조선물산장려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데 기여하였다.
1926년 1월 동우구락부가 같은 흥사단 계열인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와 통합하여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가 되고, 이어 1929년 11월 동우회(同友會)로 개편된 뒤에도 계속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월 일제가 민중대회 개최 계획을 구실로 신간회 간부를 대거 검거하자, 같은 달 신간회 평양지회 정기총회에서 지회 서기장으로 선출되어 신간회의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34년 7월에는 소년척후대(少年斥候隊) 평안남도연맹 부이사장에 선임되어 소년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37년 일제의 동우회 탄압 때 잡혀 1940년 8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상고, 1941년 11월 경성고등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4년 5개월의 옥고 끝에 석방되었다. 일본 경찰의 조사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아 불구의 몸이 되었다.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