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일제강점기 때, 동아일보 평양지국장, 조선물산장려회 이사장, 소년척후대 평안남도연맹 부이사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1920년 6월 김행일(金行一) · 이제학(李濟鶴) · 오현수(吳顯洙) 등과 대성학교 출신 학우들의 친목을 도모할 목적으로 대성학우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다. 이후 폐교된 대성학교를 살리기 위하여 모금, 강연회 개최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같은 해 8월에는 평양에서 조만식(曺晩植) · 오윤선(吳胤善) · 김동원(金東元) 등 70여 명과 함께 조선물산을 애용하자는 취지 아래 조선물산장려회를 발기하였다.
1922년 7월 평양에서 대성학교 출신인 김동원 · 김형식(金瀅植) 등과 흥사단(興士團) 계열 단체인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를 조직하였다. 1923년 1월 조선물산장려회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평양에 있는 각 종교, 사회단체를 모아 평양에서 조선물산장려를 위한 대대적인 선전행사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이후 조만식 · 김형식과 함께 실행위원이 되어 행사를 준비, 개최하여 조선물산장려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데 기여하였다.
1926년 1월 동우구락부가 같은 흥사단 계열인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와 통합하여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가 되고, 이어 1929년 11월 동우회(同友會)로 개편된 뒤에도 계속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월 일제가 민중대회 개최 계획을 구실로 신간회 간부를 대거 검거하자, 같은 달 신간회 평양지회 정기총회에서 지회 서기장으로 선출되어 신간회의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34년 7월에는 소년척후대(少年斥候隊) 평안남도연맹 부이사장에 선임되어 소년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37년 일제의 동우회 탄압 때 잡혀 1940년 8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상고, 1941년 11월 경성고등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4년 5개월의 옥고 끝에 석방되었다. 일본 경찰의 조사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아 불구의 몸이 되었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 『독립운동사』 10(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 『독립운동사자료집』 1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7)
- 『한국독립운동사』 5(국사편찬위원회, 1969)
- 「독립운동」(김호일, 『한국사』 22, 국사편찬위원회, 1978)
- 『동아일보(東亞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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