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대유(大有). 연흥부원군 김제남(金悌男)의 종손이다.
1874년 사마시를 거쳐 1882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85년에는 진주사(陳奏使) 민종묵(閔種默)을 수행하여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88년 성균관대사성, 1891년 사헌부대사헌을 지냈다.
1893년 개성부유수로 있을 때 개성부에서 민요가 일어났는데, 안핵사 박용원(朴用元)에 의하여 잠삼추장금(潛蔘推贓金)을 사용(私用)하는 등 김세기의 탐묵(貪墨)으로 말미암아 민란이 발생하였다고 탄핵받았으나 의정부에서는 그 추장금이 공용(公用)으로 사용된 것이 확실하다면서 오히려 안핵사를 견책하였다.
이리하여, 개성유수직에서는 물러났으나, 이듬해인 1894년 한성부판윤에 다시 임명되었다. 같은해 6월 민씨정권이 붕괴되고 개화파정권이 들어선 뒤 다시 개성부 민요와 관련, 문책을 받아 경상북도 영양현(英陽縣)에 유배되었다.
1895년 7월 유배에서 풀려나 1896년 중추원의관이 되었고, 이후 광무연간에 장례원경·궁내부특진관·비서원경·시종원경·전라남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905년 2월 전라남도관찰사로 재직할 때 전라남도순찰사 안종덕(安鍾悳)의 탄핵을 받아 관찰사직에서 파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