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곡성 출신. 1927년 3월 광주 지역의 학생 비밀결사인 성진회(醒進會)가 회의 이탈자들로부터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형식상 해산을 하였다. 이에 같은 해 10월 김태호(金台鎬) 집에서 같은 광주농업학교생인 김만복(金萬福)·유상걸(柳上杰)·주당석(朱唐錫)·유치오(兪致五)·정동수(鄭東秀)·문승수(文升洙) 등과 함께 성진회의 재건 방안을 협의하였다.
다음 해 6월 광주농업학교에 재학중인 성진회 회원들과 함께 일본인 교사의 사직을 요구조건으로 내걸고 동맹휴교를 주도하였다. 학교측의 보복 조처로 회원 12명과 함께 퇴학을 당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동맹휴교를 더욱 강화, 지속시키기 위해 지도부 내의 업무를 분담하고 모계부원(謀計部員)이 되어 학생들간의 연락을 맡았다.
7월에는 동지들과 함께 동맹휴교를 계속하고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를 주요 내용으로 한 성명서를 작성해 광주 읍내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에게 배포하였다. 그 뒤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같은 해 9월 2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언도받았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성진회 출신 동지들과 함께 시위를 주도하다 다시 붙잡혀,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1932년 1월 곡성군 옥과면에서 정동화(鄭東華)·한명덕(韓明德) 등과 농민단체인 옥과노동회(玉果勞動會)의 재건을 협의하고 회원 1,900여 명을 규합,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다시 붙잡혀 1934년 11월 2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언도받았다.
1986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