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한 독립운동가이다. 김철의 인적 사항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김철의 활동이 두드러진 시기는 1928년도이다. 그는 ‘세린하(細麟河) 동포참살사건 대책강구발기회’에서 한인을 조직하였고, ‘제2차 간도공산당 검거사건’을 피하였으며, 1930년에 만주에서 일어난 반제반봉건 투쟁에 참여하였다.
김철(金喆)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출생 연도와 출생지는 미상이며, 사망 연도가 1930년이라는 사실뿐이다. 일본 측 관헌 자료에는 김창민(金昌旻) · 김철(金鐵)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철은 동만주 지방에서 통일전선을 결성하기 위해 비밀리에 활동하였다. 1928년 1월 동만청년총동맹(東滿靑年總同盟)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ML파의 만주총국에서 활동하며 옌지현〔延吉縣〕 용지향(龍地鄕)의 포쁠회원으로 활약하였고, 용정촌군(龍井村郡)사회단체협의회 야체이카〔세포〕로도 활동하였다. 1928년 8월 세린하(細麟河)에서 봉천 군벌이 재만한인에게 한 만행에 항의하고자 설립한 ‘세린하 동포참살사건 대책강구발기회’ 교섭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김철은 이처럼 공개적인 활동을 통하여 한인들을 조직하고 여론을 선도하였다. 1928년 9월 ‘제2차 간도공산당 검거사건’이 일어났을 때 김철은 검거망을 피해 있었다. 이 사건은 간도 총영사관이 일으킨 것으로, 동만주 지방에서 활동하던 ML파 조직원이 대거 검거되었다.
1928년 12월 코민테른 정치서기국의 특별 결정에 따라 조선공산당의 지부승인이 취소되었다. 이후 재만한인 사회주의자의 활동은 ‘1국 1당 원칙’에 따라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며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는 것과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국내에 들어가 활동하는 것으로 나뉘었다. 김철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한편, 1930년 3월 ML파는 만주총국을 해체하고 반제반봉건운동 과정에서 검증을 통하여 개별적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서 파견된 박윤서(朴允瑞) 등은 과거 ML파 구성원들을 모아 1930년 4월 전동만폭동위원회를 결성하였는데, 김철은 여기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옌지현 등지에서 반제반봉건운동을 일으켰다. 김철이 직접 폭동의 총지휘자로 활약한 ‘간도 5 · 30봉기’는 반제반봉건운동이 최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일어났다.
김철은 1930년 6월 10일 일제 무장 경찰에 체포되어 간도 총영사관으로 압송되었고, 일주일간 단식투쟁 끝에 옥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