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고종 31) 동학운동이 시작된 뒤 9월에 최시형(崔時亨)의 명령에 따라, 북접(北接)이 기포(起包)할 때 충청남도 당진에서 박용태(朴瑢台)와 함께 기병하였다.
일본에 망명하여 있던 손병희(孫秉熙)가 과학문명을 배우게 하기 위하여 교도의 자제들을 일본에 유학시켰는데, 1904년 이들 유학생들을 지도하는 서생감독(書生監督)이 되었다.
1905년 귀국하여 천도교 통무사장(統務司長)의 재정을 담당하였다. 1906년 손병희가 귀국하여 천도교의 조직을 확대하였을 때 중정(中正)에 임명되고, 금고원(金庫員)이 된 이후로는 천도교직을 맡지는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