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영광 출신. 1919년 3월 13일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에서 일어난 3·1운동 만세시위 때 남문(南門) 밖 장터에서 고형진(高衡鎭) · 박태련(朴泰鍊) 등과 함께 학생 · 시민 등 군중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시위를 주도하다가 붙잡혔다.
같은 해 8월 2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징역 1년을 언도받았으며, 같은 해 9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는데, 재판과정에서 굽히지 않고 줄곧 법정투쟁을 전개하였다.
1927년 3월 조선청년총동맹 영광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같은 해 10월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여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하다가 붙잡혀, 1931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언도받았다.
1932년 7월부터 1933년 1월 사이에는 영광군 법성면 법성리 자택에서 정판갑(鄭判甲)과 함께 조기 건조사업을 하여, 그 수익금으로 희생된 독립운동가 가족들의 생계를 지원하는 조직을 설립하려다 붙잡혔다.
1934년 7월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언도받았으며, 같은 해 11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이 확정되었다. 그뒤 1939년 10월에도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또다시 금고 8월을 언도받았으며, 이듬해 옥고의 여독으로 사망하였다.
1986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