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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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 이후,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을 그린 지도.
문헌/고서
  • 간행 시기1623년 이후
  • 권책수1축
  • 소장처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판본채색 필사본
  • 편찬 시기1623년 이후
  • 표제남한지도(南漢地圖)
집필 및 수정
  • 집필 2024년
  • 박선영 (서울대 HK연구교수, 역사지리)
  • 최종수정 2025년 11월 26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남한지도」는 1623년 이후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을 그린 지도이다. 1축의 채색 필사본 전도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서이다. 남한산성에 대한 수축 논의가 본격화된 이후, 군사적 관리 및 방어 계획을 위하여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의 지형과 방어 시설을 상세히 묘사하여, 남한산성이 조선 후기 한양을 방어하던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보여 준다. 원성과 외성, 포루, 사찰 등 다양한 군사 및 종교적 시설들을 표시하였다.

정의

1623년 이후,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을 그린 지도.

서지사항

1축의 채색 필사본 전도이다. 크기는 세로 132㎝, 가로 83.5㎝이다. 표제는 ‘남한지도(南漢地圖)’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서이다.

편찬 및 간행 경위

남한산성(南漢山城)은 한양 도성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에 있으며, 북한산성(北漢山城)과 함께 서울을 남북으로 방어하는 주요 산성 중 하나이다.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로서,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과 용인의 석성산성(石城山城)과 함께 자연 지형적 조건을 갖춘 산성으로 평가받는다. 조선 초기에는 ‘남한산성’을 ‘일장산성’이라고 불렀으며, ‘남한산성’이라는 명칭은 선조 시기부터 사용하였다. 『남한지(南漢志)』에 따르면, 원성의 성벽 안둘레는 6,290보[약 17리 반], 바깥 둘레는 7,295보[약 20리 95보]이며, 여장은 1,940타이다. 성벽 둘레를 주척으로 환산하면 안둘레는 약 8,114m, 바깥 둘레는 약 9,411m이다.

「남한지도」의 제작자와 작성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남한산성 수축 공사를 책임지던 남한산성도총섭(南漢山城都摠攝)이 산성 관리 및 수축을 위해 제작한 것 같다. 남한산성의 수축 논의는 1624년(인조 2년)에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 대의 중립 외교를 포기하고 친명배금 정책을 채택하면서 후금(後金)을 자극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국방의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구성과 내용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을 그렸다. 원성(元城)과 외성(外城), 포루(砲壘), 돈대(墩臺), 옹성(甕城), 암문(暗門), 장대(將臺), 사찰 등을 상세히 표시한 전형적인 산성 지도이다. 지도에는 현존하는 장경사(長慶寺)를 포함하여 10개의 사찰을 표시하였다. 연무관(演武館)과 침과정(枕戈亭), 현절사(顯節祠) 등 주요 시설도 묘사하였다. 또한, 서울과의 연결을 담당하였던 송파진(松坡津)과 삼전도(三田渡), 광진(廣津)과 주요도로 및 하천도 상세히 기록하였다. 지도의 여백에는 오영장(五營將)과 담당 장대 · 원성 · 신성 · 옹성의 둘레와 암문, 대포혈(大砲穴)의 수량을 주기로 기재하였다.

의의 및 평가

남한산성의 전략적 중요성과 방어 체계를 상세히 묘사한 산성 지도로서, 조선 후기 국방과 군사적 역할을 시각적으로 잘 보여 주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 인터넷 자료

  • - [규장각 원문검색서비스](https://kyudb.snu.ac.kr)

  •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https://kyu.snu.ac.kr)

주석

  • 주1

    : 청구기호: 고축4709-34.

  • 주2

    : 독산성(禿山城).

  • 주3

    : 도총섭(都摠攝)은 조선 중기 이후의 승려 가운데 최고 직위로, 남한산성도총섭은 남한산성의 개운사에 있었다.

  • 주4

    : 조선 인조 때 남한산성 수축 당시, 승군들이 주둔하는 군막 사찰로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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