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노학준(盧學俊). 경상남도 합천 출신.
1919년 3·1운동 당시 대구에서 항일운동을 위하여, 송두환(宋斗煥)·정두희(鄭斗禧)·김종철(金鍾喆) 등이 조직한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에 가담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군자금 조달에 힘썼다.
1921년 8월에는 경주군 양북면 최세림(崔世林)의 집에, 9월에는 합천군 덕곡면 조성걸(趙性傑)의 집에 권총을 들고 들어가 군자금 모금활동을 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923년 4월에는 합천군 초계면의 문재규(文載奎)에게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23년 11월 동지 이수영(李遂榮)·최윤동(崔允東) 등이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잡힘으로써 이에 연루되어 붙잡혔다.
1923년 12월 26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어, 이듬해 4월 9일 예심이 종결되고 공판에 부쳐졌으나, 고문으로 인한 상처의 감정관계로 공판이 여러 번 연기되었다. 1924년 10월 16일 징역 10년을 구형받고, 11월 6일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공소하자, 1925년 4월 21일 대구복심법원은 징역 5년형으로 감형하였다.
1963년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