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리는 1076년(문종 30) 당악기인 방향(方響)과 함께 사용되었으며, 그 뒤 1114년(예종 9) 송나라의 신악(新樂)이 들어올 때도 피리가 여러 당악기와 함께 수입되었다. 관(管)은 오래되고 누런 대나무로 만들며, 혀(舌)는 해죽(海竹)의 껍질을 벗겨 만들어서 관에 겹서를 끼워 분다.
『고려사』악지(樂志)에 의하면 당피리(唐觱篥)는 지공(指孔)이 9개이고,『세종실록』권132의 그림에도 9개인데, 그 중 2개는 뒤에 있다. 그러나 『악학궤범』에 의하면 상(上, 즉 仲呂)과 구(句, 즉 蕤賓)의 음은 모두 한 구멍에서 낼 수 있기 때문에 9구멍을 8구멍으로 고쳤다. 그 뒤로 오늘날까지 당피리의 구멍은 향피리와 같이 8개이다.
음역은 황종(黃)에서 청남려(湳)까지 약 1옥타브 반 이상이다. 관대가 크고 혀가 크므로 부는 데 조금 힘이 들지만 음색은 폭넓고 활달하다. 당피리로 연주하는 음악은 「보허자(步虛子)」·「낙양춘(洛陽春)」·「보태평(保太平)」·「정대업(定大業)」·「여민락만(與民樂慢)」·「본령(本令)」·「해령(解令)」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