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령 국사여성황사는 대관령 국사서낭(성황)의 부인인 여서낭을 모시는 곳이다. 세 칸 기와집으로 되어있다. 정면 벽에는 머리를 길게 땋아 좌측 어깨 앞으로 늘어뜨린 여서낭 영정이 있으며, 그 앞에는 호랑이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화상(畵像) 앞에는 ‘국사여성황신위’라고 쓴 위패가 세워져 있다.
옛날에는 남문동 무기고 제방에 있었으나 3 · 1운동이 일어난 1919년을 전후하여 없어졌다고 하는데, 지금처럼 제방이 견고하지 못해서 큰물이 내려오면 떠내려가기도 하였다고 한다.
여서낭은 전설에 의하면 강릉에 사는 정씨가(鄭氏家)의 딸이었다고 한다. 여성황사(여서낭당)의 관리도 주로 정씨가의 후손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제사는 해마다 음력 4월 정일(丁日)과 해일(亥日)을 택하여 동네 주민들이 지냈다고 한다.
대관령에서 국사서낭을 모시고 음력 4월 15일에 내려오면 단오제가 있을 때까지 여성황사에 함께 모셨다가 단옷날에 제사를 지내게 된다. 1년에 한번 남서낭과 여서낭 부부가 함께 있게 되는 셈이다.
대개 단옷날 이틀 전 5시경에 여성황사에서 강릉시장 · 강릉경찰서장 등이 제관이 되어 조복(朝服)을 하고 제사를 지내며, 무녀의 굿과 관노탈놀이를 마친 뒤 시내로 횃불행진에 들어간다.
여성황사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도중에 정씨가지(鄭氏家址)에 들러 잠시 쉰다. 정씨가는 여서낭의 친정이므로 국사서낭의 처가가 되는 셈이다. 이 집에는 지금은 최씨네가 살고 있는데, 원래 정씨가에서 제사하던 일을 지금은 그 집에서 사는 최씨네가 제물을 마련하여 간단한 굿을 하고 제사를 지낸다.
국사여서낭신에 관한 신화는 다음과 같다. 옛날 강릉 최돈목(崔敦穆)의 집자리에 동래정씨 현덕(賢德)이 살고 있었다. 마침 과년한 딸이 있었는데, 하루는 꿈에 대관령 서낭신이 나타나 정씨집에 장가들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사람이 아닌 서낭을 사위로 삼을 수 없노라고 거절하였다. 어느 날 정씨가의 딸이 노랑 저고리에 다홍치마로 단장하고 뒷마루에 앉아 있는데 범이 와서 업고 달아났다. 소녀를 업어간 범은 산신이 보낸 사자(使者)였다. 대관령 국사서낭이 소녀를 데려다가 아내로 삼은 것이다.
딸이 범에게 물려간 것을 안 정씨집에서 국사서낭을 찾아가 보니, 그와 함께 있던 딸은 벌써 죽어서 정신은 없고 몸만 비석처럼 서 있었다. 가족들이 화공을 불러 딸의 화상을 그려 세우니 비석처럼 서 있던 처녀의 몸이 비로소 떨어졌다고 한다.
인간과 서낭신과의 교혼을 다룬 이류교혼담(異類交婚譚)에 속하는 설화이다. 호랑이가 처녀를 데려다가 혼배(魂配)한 날이 음력 4월 15일이므로 이 날부터 단옷날까지 국사서낭을 여성황사에 함께 모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