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체제에 의한 수탈이 점차 가혹해지고, 이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 계속되는 가운데 덕원부사 김문제(金文濟)가 공금을 유용하고 이를 민간으로부터 징수하였다.
이에 1892년 봄 전 주서(注書) 엄익조(嚴益祚)가 그의 종손 엄기태(嚴基泰), 장의(掌議) 홍명조(洪命祚) 등과 함께 민폐 교정을 내걸고 사람을 모아 관에 쳐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이도근(李道根)·조영달(趙永達)·차남원(車南元), 부사의 잘못된 징수 처사를 마땅하지 않게 여기고 있던 강창호(姜昌浩)·조기섭(趙基燮) 등이 적극 참여하였다.
관에 들어간 난군은 부사를 응징하고 인가를 불태우고 훼손하였는데, 이 때 고을에 있는 장교 가운데 우두머리인 수교(首校)와 관아의 수석아전인 수리(首吏)는 도망을 하였다.
민란의 처리과정을 살펴보면, 조정에서는 함경도관찰사로 하여금 엄익조를 엄형한 뒤 먼 섬에 유배, 홍명조와 엄기태는 엄형 후 원지정배(遠地定配), 강창호·조기섭은 엄형원배(嚴刑遠配), 민란의 과정에서 집을 헐어버린 조석준(趙石俊)은 형배(刑配)하게 하였다.
민란을 막지 못한 수향(首鄕) 김기호(金基灝)와 민란이 일어나자 도망을 간 수교 이계조(李啓祚), 수리 김경순(金京順)은 본영(本營)으로 하여금 죄의 경중을 가려 처리하게 하였다.
탐관오리 김문제는 의금부로 하여금 나처(拿處)하게 하였으며, 김문제 밑에서 일을 천단하고 격변(激變)을 양성(釀成)한 겸인(兼人) 김재식(金載植)은 형조로 하여금 엄형한 뒤 강서현(江西縣)으로 유배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