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 이식(李植)이 지은 기문(記文). 그의 저서 ≪택당집 澤堂集≫ 제9권에 수록되어 있다. 이 글은 독서당(讀書堂) 남루(南樓)를 새로 지은 것에 감동하여 퇴보 일로에 있던 사문(斯文)이 장차 부흥하리라는 희망을 안고 지은 것이다.
본문을 보면 “남루(南樓)가 장차 무너지려는 것을 보고 그 친구인 이경의(李景義)가 개연히 새로 지어 단청까지 아름답게 해놓아서 여러 선생들이 가끔 술을 놓고 즐긴다. 여기에 기(記)가 없을 수 없다 하여 나에게 부탁하므로 한마디 쓰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이 독서당의 흥폐와 우리의 문운(文運)의 성쇠와 관련지어 생각한다. 우리나라 초기에는 고려의 폐단이 이어져서 절과 사원(寺院)이 도처에 가득차 있더니 그 뒤로 차차 절은 헐어 없애고 서당을 지어 당시의 문학을 숭상하고 이단을 배척하는 아름다움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서쪽 오랑캐가 다시 으르렁거려 병량(兵糧)을 준비하게 되어 전대(前代)와 같은 성관(盛觀)이 없게 되었으니 또한 슬픈 일이다.
그러나 세상 이치는 기울어지지 않으면 평탄하게 되지 않고 헒이 없으면 새로워지지 못하는 법이다. 방금 문사(文事)가 몹시 폐해졌으니 극도에 이르면 마땅히 변하는 법이다.
이제 사문이 일어나는 것이 반드시 서당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니, 이군(李君)의 이 역사가 어찌 장차 옛 규모를 회복할 조짐이 되지 않으랴. ”고 하였다. 이 글은 독서당의 흥폐가 곧 문운의 성쇠와 같은 것이라 생각하고, 그 허물어지고 새로 보수한 경위를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