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암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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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옹속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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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년에 박종경이 주조한 동활자. 전사자.
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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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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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16년에 박종경이 주조한 동활자. 전사자.
내용

이 활자의 명칭은 1822년에 찍어낸 남공철(南公轍)의 문집인 ≪영옹속고 穎翁續藁≫에 ‘全史字體(전사자체)’라고 표시되어 있는 데에서 전사자로도 관용되어 왔다.

당시 관각(館閣)을 주재하였던 남공철이 자신의 저서인 ≪고려명신전 高麗名臣傳≫에서 ‘聚珍板(취진판)’이라 표시하고, 홍양호(洪良浩)의 ≪이계집 耳溪集≫에도 ‘취진자’라고 표시하였다.

박종경의 문집인 ≪돈암집 敦巖集≫의 서후(書後)에는 “몇 해 걸려 물재(物財)를 모아 당본활자(唐本活字) 20만 자를 주조하였다.”는 기록이 있음을 고려하면, 당시의 중국본에 대한 취미로 이러한 글자체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활자가 돈암 박종경에 의하여 주성되었고, 그의 아버지의 시문집인 ≪금석집 錦石集≫의 표제면에 ‘돈암활인(敦巖活印)’이라는 표시가 있는 점에서 ‘돈암자’라 부른다.

이와 같이 이 활자는 관부에서 만든 것이 아니고 개인이 주조하여 사유(私有)하고 있었기 때문에 1857년(철종 8) 10월의 주자소(鑄字所) 화재 때 불타지 않았다. 1822년에 처음 찍은 책으로는 박종경의 선조의 문집인 ≪반남박씨오세유고 潘南朴氏五世遺稿≫·≪근재집 近齋集≫·≪금석집≫ 등이 있다.

1859년에 인출된 ≪완산지장 完山誌狀≫은 대릉(大陵)에서 찍어냈고, 대원군이 집정할 때에는 운현궁(雲峴宮)으로 가지고 가서 책을 찍어냈으므로 ‘운현궁활자’라 불리기도 하였다. ≪위암시록 韋菴詩錄≫ 등의 자료에 의하면, 1879년(고종 16)에는 수천정(壽泉亭)에서 인쇄하기도 하였다.

관용문적(官用文籍)은 대원군이 집정하던 무렵에 약간 나타나고 있을 뿐 한말까지 주로 민간의 편저서를 인쇄하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이 활자는 교서관인서체철활자(校書館印書體鐵活字)에 비하여 자체의 균형이 잘 잡혀 있고 정교롭게 주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참고문헌

『한국고인쇄기술사』(김두종, 탐구당, 1974)
『한국고인쇄사』(천혜봉, 한국도서관학연구회, 1976)
『한국의 고활자』(손보기, 보진재, 1982)
『한국전적인쇄사』(천혜봉, 범우사, 1990)
『조선후기의 활자와 책』(윤병태, 범우사, 1992)
「조선후기활자본의 형태학적연구 하」(백린, 『한국사연구』 4, 1969)
「돈암인서체자와 그 초인본들」(윤병태, 『국회도서관보』 1974. 8.∼197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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