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활자의 명칭은 1822년에 찍어낸 남공철(南公轍)의 문집인 ≪영옹속고 穎翁續藁≫에 ‘全史字體(전사자체)’라고 표시되어 있는 데에서 전사자로도 관용되어 왔다.
당시 관각(館閣)을 주재하였던 남공철이 자신의 저서인 ≪고려명신전 高麗名臣傳≫에서 ‘聚珍板(취진판)’이라 표시하고, 홍양호(洪良浩)의 ≪이계집 耳溪集≫에도 ‘취진자’라고 표시하였다.
박종경의 문집인 ≪돈암집 敦巖集≫의 서후(書後)에는 “몇 해 걸려 물재(物財)를 모아 당본활자(唐本活字) 20만 자를 주조하였다.”는 기록이 있음을 고려하면, 당시의 중국본에 대한 취미로 이러한 글자체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활자가 돈암 박종경에 의하여 주성되었고, 그의 아버지의 시문집인 ≪금석집 錦石集≫의 표제면에 ‘돈암활인(敦巖活印)’이라는 표시가 있는 점에서 ‘돈암자’라 부른다.
이와 같이 이 활자는 관부에서 만든 것이 아니고 개인이 주조하여 사유(私有)하고 있었기 때문에 1857년(철종 8) 10월의 주자소(鑄字所) 화재 때 불타지 않았다. 1822년에 처음 찍은 책으로는 박종경의 선조의 문집인 ≪반남박씨오세유고 潘南朴氏五世遺稿≫·≪근재집 近齋集≫·≪금석집≫ 등이 있다.
1859년에 인출된 ≪완산지장 完山誌狀≫은 대릉(大陵)에서 찍어냈고, 대원군이 집정할 때에는 운현궁(雲峴宮)으로 가지고 가서 책을 찍어냈으므로 ‘운현궁활자’라 불리기도 하였다. ≪위암시록 韋菴詩錄≫ 등의 자료에 의하면, 1879년(고종 16)에는 수천정(壽泉亭)에서 인쇄하기도 하였다.
관용문적(官用文籍)은 대원군이 집정하던 무렵에 약간 나타나고 있을 뿐 한말까지 주로 민간의 편저서를 인쇄하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이 활자는 교서관인서체철활자(校書館印書體鐵活字)에 비하여 자체의 균형이 잘 잡혀 있고 정교롭게 주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