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청년회의 분회로서 설립되었으며, 초대 총무는 김정식(金貞植), 간사는 장혜순(張惠淳)이었다.
조직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1924년 회장·총무·간사로 구성된 임원 제도를 이사장·이사제로 변경하였다. 이사장에는 채필근(蔡弼近)·최승만(崔承萬), 이사에는 한위건(韓偉健)·김낙영(金洛泳)·강봉우(姜鳳羽)·김상돈(金相敦) 등이 역임했는데, 그 뒤 총무제로 바뀌었다가 1935년 다시 이사제로 환원되었다.
활동 부서로는 1926년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종교부·교육부·체육부·친접부(親接部)·인제부(引濟部) 등이 있었다고 한다. 1914년 2층 목조로 된 동경기독교청년회관을 신축해 유학생의 기숙사·집회장 그리고 예배장으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당시로서는 동경에 있는 유일한 조선인 집회 장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0년과 1921년에는 유학생들로 구성된 조선원정야구단을 구성해 각 도시를 돌며 순회경기를 가졌다. 그리고 1922년에는 유학생인 송의정(宋義禎)·백남훈(白南薰)·송창근(宋昌根)·채필근 등으로 순회전도대를 구성해, 조선내 각 도시를 돌며 순회 강연을 하였다. 그런데 1923년 9월 동경대진재 때 회관이 소실된 이후에는 회관 재건립에 노력하였다.
1925년 8월 서울에서 동경조선인기독교청년회관 건축후원회가 결성되었다. 회원 수는 신석우(申錫雨) 등 70여 명이었으며, 백관수(白寬洙)·박승철(朴勝喆)·유진태(兪鎭泰)·한기악(韓基岳)·송진우(宋鎭禹) 등이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각계에서 모은 14만원의 성금으로 1929년 3월 회관을 재건립하였다. 한편, 1927년 동경에 있는 민족해방운동단체들의 협의체인 조선인단체협의회에 가맹해 활동하였다.
그리고 매년 동경진재일에는 희생된 조선인의 위령제를 개최하였다. 기관지로는 1917년 11월부터 ≪기독청년 基督靑年≫을 간행하였다. 그런데 1923년 7월≪젊은이≫로 개제했으며, 월 1회 1000여 부를 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