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창(金德昌)이 김덕창염직공소(金德昌染織工所)를 주식회사 형태로 개편하여 세운 회사이다.
김덕창염직공소는 1897년 서울에서 설립된 것으로 바탕직기를 사용하여 직조하였다. 주 생산물은 면직물이었으나, 견직물과 모시도 생산하였으며, 1910년에는 17대의 직기와 40명의 직공을 고용하고 있어 당시로서는 규모가 큰 직포공장이었다.
1919년 동양염직주식회사로 개편되었을 때는 사장 이덕유(李德裕), 전무취체역 김덕창, 취체역 박승직(朴承稷)·최인성(崔仁成)·최준환(崔俊煥)·변상호(邊相昊)·김윤수(金潤秀) 등이었다. 중역진은 모두 서울 포목업계의 거상(巨商)들이었으며, 회사를 실제 운영한 것은 김덕창이었다.
김덕창은 부유한 포목상인을 사장으로 추대하고, 포목업계의 거상을 중역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이들과 일정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또 지원을 받으면서 회사를 경영하였다.
설립 후 경영상태가 부진하여 1920년에는 자본금이 50만원이었으나, 1923년에는 40만원으로 줄었다. 그러나 1929년의 한 조사에는 당시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많이 사용한 면포가 동양염직주식회사의 제품인 동양목(東洋木)이었다고 한다.
동양목은 질긴 면포였기 때문에 조선인들로부터 인기가 좋았던 것이다. 1939년에는 이현재(李賢在)가, 1941년에는 김덕창이 사장에 취임하였는데, 지금까지 김덕창의 회사 경영방식으로 보아 김덕창이 사장으로 취임하였다는 것은 서울포목업계로부터의 지원이 끊겼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1943년 김덕창의 세 아들인 성호(成浩)·광호(光浩)가 취체역에, 명호(明浩)가 감사에 취임하였으며, 큰아들인 성호가 회사를 실제로 운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