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림의 왼쪽 상단부에 ‘養松(양송)’이라는 그의 호가 적혀 있고, 그 밑에 ‘金禔季綏(김시계수)’라는 주문방인(朱文方印)이 찍혀 있다. 연기(年記)가 없어 확실한 제작연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활동 시기와 화풍 등으로 미루어보아 16세기 후반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측된다.
근경의 통나무다리를 앞에 두고 건너지 않으려고 뒷걸음치는 나귀의 고삐를 잡아끌고 있는 어린 동자의 모습을 중심으로 묘사된 소경산수인물화(小景山水人物畵) 계통의 그림이다. 구성은 각 경물들이 화면의 왼쪽으로 치우친 편파구도에, 근경 위주로 짜여져 있다.
이러한 구성법은 남송시대의 마하파 구도(馬夏派構圖)를 계승한 명대의 절파화풍(浙派畵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비스듬하게 쓰러질듯이 솟은 주산(主山)의 각진 모습, 바위와 주봉(主峯)의 표면에 가해진 흑백 대비가 심한 묵법(墨法), 분방한 양태의 부벽준(斧劈皴), 그리고 강한 대조감을 유발시키는 백색의 태점, 구불구불한 윤곽선 등도 절파화풍의 특징을 반영한다.
이와 같은 화풍은 이경윤(李慶胤)의 「사호위기도(四晧圍碁圖)」와 김명국(金明國)의 「설중귀려도(雪中歸驢圖)」 등에 영향을 미치는 등 조선 중기의 절파풍 전개에 계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그림은 조선 중기에 가장 먼저 절파화풍을 수용하였던 김시의 회화사적 위치를 뒷받침하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