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전투 ()

고려시대사
사건
1218년(고종 5), 동주에서 벌어진 고려군과 거란군 사이의 전투.
사건/전쟁
발발 시기
1218년(고종 5)
종결 시기
1218년(고종 5)
발발 장소
동주
관련 단체
거란 유종
관련 인물
조충|김취려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동주전투는 1218년(고종 5) 동주(洞州, 현 황해도 서흥)에서 고려군과 거란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이때의 거란군은 1216년(고종 3) 몽골군과의 싸움에서 패해 새로운 생활 근거지를 찾기 위해 고려로 침입을 감행한, 유종(遺種)의 군대였다. 동주는 고려의 수도인 개경과 가까운 거리였기에 군사 전략에서 중요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동주전투의 승리는 고려군과 거란군 전쟁의 중요한 분수령이라 할 수 있고, 그 결과 거란군은 최후의 보루인 강동성(江東城)까지 퇴각하게 되었다.

정의
1218년(고종 5), 동주에서 벌어진 고려군과 거란군 사이의 전투.
배경 및 발단

1216년(고종 3) 거란(契丹)의 유종(遺種)은 몽골군과의 싸움에서 패해 새로운 생활 근거지를 찾기 위해 고려를 침략하였다. 고려군은 초기의 부진을 씻고 1217년(고종 4) 7월부터 황려현(黃驪縣, 현 경기도 여주) 전투와 제주(堤州, 현 충청북도 제천)의 박달현 전투(朴達峴戰鬪)에서 대승을 거뒀다. 그리고 명주(溟州, 현 강원도 강릉)에서 혈전(血戰)을 통해 거란군을 여진(女眞) 지역으로 몰아내는 전과(戰果)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진 지역으로 쫓겨갔던 거란군은 여진의 군사를 얻어 세력을 회복한 뒤, 1217년 10월 장성(長城)을 넘어 다시 공격해 왔다.

그들은 전군병마사(前軍兵馬使)였던 김취려(金就礪)와 예주(豫州, 현 함경남도 정평)의 생천(栍川)에서 교전하고 일단 물러났다. 이때 김취려는 갑자기 위중한 병을 얻어 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는 김취려가 없는 상황에서 거란군의 거센 공격을 막지 못하고, 철령(鐵嶺) 이북의 땅 대부분을 내주고 말았다. 1218년(고종 5) 3월과 4월이 되자 거란군은 함경도평안도의 분수령을 넘어 청천강대동강 사이의 지역까지 육박하였다.

다급해진 고려 조정에서는 조충(趙冲)의 후임으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김군수(金君綏)를 서북면(西北面) 병마사(兵馬使)로 삼아 대적하게 하였다. 그러나 몇 차례의 승리만을 거두었을 뿐 거란군의 침략을 근본적으로 막지는 못하였다.

경과 및 결과

1218년 7월 고려 조정은 군사를 정비한 뒤, 수사공(守司空) 조충을 재기용해 서북면 원수(西北面元帥)로 삼았다. 그리고 병에서 회복한 김취려를 다시 병마사로 등용하였다. 또한 정통보(鄭通寶)를 전군으로, 오수기(吳壽祺)를 좌군으로, 신선주(申宣胄)를 우군으로, 이림(李霖)을 후군으로, 이적유(李迪遺)를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삼아 거란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한편, 여러 도의 안찰사(按察使)에게도 명을 내려 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돕도록 하였다. 그 결과 조충, 김취려 등은 1218년 9월에 출병하여 동주(洞州, 현 황해도 서흥)의 동곡(東谷)에서 거란군을 물리쳤다. 그리고 거란의 모극(謀克) 고연(高延)과 천호(千戶) 아로(阿老) 등을 사로잡고, 성주(成州, 현 평안남도 성천)로 나아갔다.

의의 및 평가

동주는 국도(國都)인 개경과 가까운 거리였기에 이곳은 군사 전략에서 중요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동주전투의 승리로 고려군은 결정적인 승기를 잡고 거란군을 거세게 몰아붙일 수 있었다. 그 뒤 계속해서 고려군에게 밀린 거란군은 그들에게 최후의 보루였던 강동성(江東城: 현 평안남도 강동)까지 퇴각하기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김상기, 『고려시대사』(동국문화사, 1961)
『13세기 고려와 김취려의 활약』(한국중세사학회, 2011)

논문

신안식, 「고려 고종초기 거란유종의 침입과 김취려의 활약」(『한국중세사연구』 30, 한국중세사학회, 2011)
장평문, 「북방의 적을 제압한 조충」(『군사』 12,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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