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악양루탄관산융마」는 신광수의 나이 35세 때 한성시에서 2등으로 합격한 과시(科詩)로, 조선 후기 과시의 전형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총 44구(句) 22연(聯)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목의 글자 중 하나인 ‘루(樓)’ 자를 운(韻)으로 삼아 압운(押韻)하였지만, 4연에서 해당 글자를 압운하는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 출구(出句)의 앞 2자는 평성(平聲), 대구(對句)의 앞 2자는 측성(仄聲)으로 맞추는 규칙을 어느 정도 준수하였다.
「등악양루탄관산융마」는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57세 때 유랑길에서 지은 오언 율시(五言律詩)인 「악양루(岳陽樓)」를 토대로, 두보의 시 가운데 이별의 정한(情恨)을 담은 시구들을 선별하여 평측(平仄)을 고려해 구법(句法)을 변환하거나 복수의 시구를 조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두보의 「추흥(秋興)」 8수 가운데 제 2수와 제 4수에서 시상(詩想)을 가장 많이 차용하였다.
「등악양루탄관산융마」는 당나라 시인 두보가 전란(戰亂)으로 유랑(流浪)하다가, 악주(岳州)의 악양루(岳陽樓)에 올라 북방에 전란이 계속되는 것을 탄식하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시구는 다음과 같다. “…… 도죽 지팡이로 떠도는 길에 백구가 따른다/오랑캐 땅 황혼 녁에 난간에 기대어 한탄하노니/저 북쪽의 전란은 어느 날에나 멈출까/봄꽃 핀 고향에서 눈물 뿌리고 떠나온 후/…… 풍진에 아우들 생각 눈물이 마르려 하고/드넓은 강 위에 벗들은 소식조차 없구나/부평초(浮萍草) 같이 천지를 떠돌며 이 누각(樓閣)이 높으니/어지러운 시대에 올라보니 네 신세가 구슬프다…….”
18세기 말엽에 「등악양루탄관산융마」는 당대 문인들 사이에서 과시의 모범이 되는 작품이었다. 뿐만 아니라 평양 기생에 의해 노래로 불리기 시작하여, 특히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의 영시(詠詩) 또는 율창(律唱)이라고도 하는 시창(詩唱)으로 불렸고, 경상도 지방과 전라도 지방에서도 불렸다. 「등악양루탄관산융마」의 시창은 조선 후기에 과시가 정통 문학의 범주에서는 배척받았지만, 선비들과 교방(敎坊)의 문예 공간에서는 친숙한 문학 양식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