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항일기를 거치면서 우리 나라와 일본에 흩어져 있었는데, 최근 20여 책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한국한문학연구회에서 ≪낙하생전집 洛下生全集≫ 3권으로 영인, 출판하였다.
이 전집에 수록된 그의 저술은 춘성당집(春星堂集)(詩), 죽수집(竹樹集)(詩), 삼서(蔘書)(삼재배에 관한 내용), 인수옥집(因樹屋集) 1·2·3(詩·文), 영남악부(嶺南樂府)(영사악부시), 인수옥집 4·5·6·7·8(詩·文·尺牘), 포화옥집(匏花屋集)(詩·文), 채화거집(菜花居集)(詩·文), 포화옥집 2(시·문), 해류암집(海榴菴集) 1·2(詩·文), 문의당집(文漪堂集) 1·2(詩·文), 추수근재집(秋樹根齋集) 1·2(詩·文), 고불고시집(觚不觚詩集)(詩), 백문창화집(白門倡和集)(詩), 각시재집(卻是齋集)(詩·文), 각시재재집(卻是齋再集)(詩), 국반재집(菊半再集)(詩), 습유(拾遺)(詩), 동사일지(東事日知)(歷史考證) 등이다.
이 전집은 저자 종형가(從兄家)의 후손(강원도 횡성군 거주)이 대대로 보관해 오던 8책과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 이마니시문고본(今西龍文庫本) 9책, 일본 도요문고본(東洋文庫本) 2책, 서울대학교 가람문고본과 규장각도서 각 1책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 횡성본과 덴리대학본은 모두 저자의 친필 수사본으로 추정되며, 그 밖의 것은 수사이본(手寫異本)들이다.
그런데 위 전집에서 규장각도서 1책(秋樹根齋集)은 덴리대학본과 그 내용이 대부분 중복되나 2책이 그대로 함께 실렸고, 덴리대학본 중 1책(郤是齋集)은 친필본이 있으나 제외되고 대신 도요문고본이 실렸다.
가람문고본[嶺南樂府]을 비롯한 이본들은 모두 오자·탈자가 많은 편이다. 별집 외에는 모두가 지어진 연차순으로 문체의 구분없이 엮고, 저자 자신의 당호로써 편명을 붙였다. 글 중에 서명과 제목은 언급되었으나 찾을 수 없는 것(名物考·食忌譜·九數詳·廣詩則·史評十八則)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몇 권이 흩어져서 일부가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은 저자가 신유옥사에 연루되어 24년 간 유배되었던 김해에서 지어진 것이다. 본래 가문의 영향으로 조선 후기의 실학적 지성을 갖추었던 저자가 당쟁에 희생됨에 따라, 당대 봉건지배체제의 제반 모순을 훨씬 정확하게 인식하게 되었고, 더욱이 함께 연루되어 강진에 정배되어 있던 정약용(丁若鏞)과의 동인적 문학교류에 의하여 더욱 그 시각이 확충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특수한 위치에서 저술된 ≪낙하생고≫는 평범한 문집류와는 달리, 다양하면서도 독특한 내용을 담게 되었다. 곧, 하층민들의 고난에 찬 삶의 실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사회시들, 우리의 역사를 소재로 하여 풍자와 해학으로 지배층의 실정(失政)을 통렬하게 비판한 장편의 악부시들, 민요를 한역하고 향토색 짙은 방언을 시어로 구사한 시, 그 지역 고유의 풍속과 민중들의 생활정감에 근접하여 흥미롭게 관찰한 연작 장편의 기속시(紀俗詩) 등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아울러 흔히 잡저로 분류되는 산문 저술은 실학자로서의 주체적 사고와 박학주의적인 학풍이 돋보이는 바, 우리의 역사·지리·정치제도는 물론 과학·수학·농학·음운학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식견을 갖춘 것들이다. 이는 단순한 박학의 과시가 아니라,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에 기여하고자 하는 실학자적 선비의식의 소산이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