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20장). 한글궁체로 된 필사본. 헌종이 죽은 1849년(헌종 15) 6월 6일부터 철종이 즉위한 6월 9일 사이에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이다.
후기(後記)에 철종이 즉위하던 해의 8월 계동월방에서 친교로 마지못해 베껴 쓴 것이라고 되어 있을 뿐, 필사자는 알 수 없다. 『비서(飛書)』와 『난성기여(蘭省記餘)』에 수록된 윤정선(尹定善)의 「긔유긔ᄉᆞ(己酉記事)」는 이 책의 이본인 듯하다.
헌종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金氏)가 여러 각신(閣臣)을 불러 의논하였다. 각신들은 종사의 시급함을 주청하며 영조의 혈손 전계군(全溪君)의 셋째아들 덕완군(德完君) 이원범(李元範)으로 사왕(嗣王)을 삼을 것을 결정하였다. 정원용(鄭元容)으로 봉영사신을 삼아 그 날로 덕완군이 살고 있는 강화부로 보내어 데려오게 하였다.
덕완군은 6월 9일 희정궁(熙政宮)에서 관례를 마치고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즉위하였다. 제신이 신왕에게 하례하고 왕이 어탑(御榻)에서 내려 백관을 거느리고 희정당 수렴소(垂簾所)에 건하하였다. 대왕대비는 신하들에게 신왕을 잘 보필하여 이끌어줄 것을 당부하고, 신왕에게도 언교를 내려 가르침을 주었다.
제신은 신왕에게 강학(講學)이 시급함을 강조하여 현대부를 뽑아 강연(講筵)에 모실 것을 아울러 청하였다. 순원왕후는 현대부라 일컬으면서 굽은 도리로 왕을 가르쳐 원망이 왕에게 돌아오는 사례가 있음을 경계하였다. 또한, 왕이 잘못을 범하면 여러 신하가 못하게 할 것과 성의를 다해 이끌어줄 것을 당부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언교를 한문으로 옮겨 적어 임금이 항상 볼 수 있게 하고 조보(朝報)에 반포할 것을 청하니, 받아들여졌다.
이 글은 이처럼 막중한 나랏일을 치르는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생생하게 기록한 글이다. 내용은 표면적으로는 왕실의 존엄과 국왕의 자표(姿表)를 칭찬하며 국운의 경사를 기리고 있다.
실제로는 세도정치의 그늘에서 억눌린 왕권의 실추와 허약해진 조선 말의 국운을 느끼게 해준다. 소재는 실록의 사실과 일치하나 사건의 취사선택과 구성 면에서 궁정문학의 한 특징을 보이는 연설류(筵說類)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