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는 1466년(세조 12) 5월 단오절을 맞아 문무관을 대상으로 발영시(拔英試)를 시행하여 문과에서는 김수온(金守溫) 포함 40명, 무과에서는 금휘(琴徽)를 비롯한 43인을 선발하였다.
같은 해 7월 세조는 공조판서 구종직(丘從直) 등을 불러 사덕(四德)과 사단(四端)에 대한 이야기로 직접 책제(策題)를 낸 후 종실, 문신과 자원자들을 모아 대책문을 짓게 하였다. 이에 모두 30여 명이 글을 지었는데, 그중에서 김수온(金守溫)을 비롯하여 12명을 선발하였다. 이 시험을 등준시(登俊試)라고 한다. 이 때는 특별히 종친에게도 응시를 허용하였기 때문에 종친인 영순군(永順君) 부(溥)도 합격자에 들었다. 이어 같은 해 9월에 무과 등준시를 실시하여 최적(崔適)과 종친인 구성군(龜城君) 준(浚) 등 51명을 선발하였다. 이 시험의 합격자에게는 중시의 예에 따라 홍패(紅牌)를 수여하고 품계를 올려 주었다.
세조대 발영시와 등준시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이 취약했던 세조가 자신을 지지하는 관료와 종친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는 친화책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다.
세조대의 등준시는 하나의 전례가 되어 영조대에 다시 시행되었다. 1774년(영조 50) 영조는 81세를 맞아 연초에 문소전(文昭殿)과 경복궁의 옛터를 방문하였는데, 이날 세조대의 고사에 따라 등준시를 시행하였다. 시험은 1월 15일 경복궁 근정전의 옛터에서 시행되었는데, 종1품부터 정3품 당상관까지 응시하게 하였다. 문과에서는 조덕성(趙德城)를 비롯한 15인, 무과에서는 이춘기(李春琦) 포함 18명을 선발하였다. 1774년의 등준시는 노년의 영조가 선왕의 업적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시행한 시험으로 신료들에 대한 포상의 성격이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