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공(雇工) · 고용(雇傭) · 용인(傭人) 등으로도 불렸다. 1527년(중종 22)에 나온 최세진(崔世珍)의 ≪훈몽자회 訓蒙字會≫에 고공이 머슴으로 표기된 점으로 보아 머슴의 어원이 상당히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임금을 받는 노동자로서의 머슴은 19세기, 특히 1894년(고종 31)의 갑오경장 후에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를 통하여 노비들도 머슴으로 많이 전환하였고, 호칭도 머슴으로 고정되어 갔다.
고용기간에 따라 분류하면 일년 단위로 고용되던 머슴, 달 또는 계절로 고용되던 달머슴[月傭]과 반머슴[季節傭]이 있었다. 고지(雇只)머슴이라는 특수한 형태도 있었는데, 일정한 토지나 가옥, 또는 식량을 대여받고 고용주를 위하여 일정 기일의 노동을 하거나 일정 작업량을 수행해 주었다. 또 노동력과 농사경험에 따라 나누면 상머슴과 중머슴, 그리고 보조적인 노동을 하는 꼴담살이가 있었다.
이러한 분류는 곧 새경의 차이를 의미한다. 조선 후기 이래 농업생산의 변동으로 인하여 양극적인 농민층 분화가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광공업이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농촌에는 많은 몰락농민이 퇴적되어 있었다.
또한 우리 나라의 경종(耕種) 위주의 농법은 농번기에 일시적으로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노동력이 더욱 많이 투하되면서 노동집약화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조건이 많은 머슴을 창출시켰다.
민족항일기에 들어 일제의 토지약탈과 인구증가로 인하여 몰락농민층은 더욱 증가하였고 머슴수도 상당해졌다. 1930년 통계로 보면 고용주 44만2908명에게 머슴 53만7432명이 고용되었다. 머슴의 수효는 1940년경까지 계속 증가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1940년대 이후 지원병 · 징병으로 노동력이 차출되고, 약간의 공장도 건설되고 경기가 좋던 만주로 많은 인구가 유출됨에 따라 특히 서북지방의 농가에서는 머슴을 고용하기가 어려워졌다. 머슴들은 몰락농민이 많던 삼남지방에 주로 고용되었고 고용주는 지주 외에도 소작농과 순소작농도 있었다.
대부분의 고용농가에서 머슴은 가족노동력의 보충에 불과하였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상업적 농업을 목적으로 머슴을 고용하기도 하였다. 머슴들은 대개 1년을 단위로 고용주와 구두계약을 맺었다.
이들의 관계는 순수한 경제적인 것이었지만, 때로는 양반 출신의 지주가 소작농 중 건장한 자를 골라 강제적으로 머슴을 삼는 예도 있었다. 또 새경이 부담되던 빈농 중에서도 머슴을 데릴사위로 맞아들이기도 하였다.
머슴이 되는 사람은 대부분 가족이 없는 장년의 남자가 많았다. 간혹 여자도 머슴이 되거나 부부가 함께 고용되던 예도 있었으나 흔하지는 않았다.
고용주의 가족들은 머슴에 대해 하인과 동일시하여 반말을 하는 등의 노골적인 인격 손상행위를 할 수는 없었지만,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의 차별대우를 하였고, 머슴도 그것을 받아들였다.
머슴은 농업노동뿐만 아니라 연료채취와 같은 가사노동에도 사역되었다. 하루 노동시간을 10시간으로 계산하면 머슴은 연평균 225일을, 그리고 고용주와 그 가족은 139일을 노동한 것으로 나타난다. 농번기에는 그들의 노동시간은 아침부터 잠자기 전까지이며, 노동의 강도도 고용주 가족보다 물론 강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머슴밥’이라고 하는 엄청난 양의 식사를 하루 5, 6차례나 할 수 있었다. 농한기에는 그래도 한가한 편이지만 비료와 연료를 채취하고 가마니를 짜고 새끼를 꼬아야 하였다.
머슴의 새경(농가에서 1년 동안 일해 준 대가로 주인이 머슴에게 주는 곡물 또는 돈)은 통상 현물로 지불되었는데, 대개 벼 1석 내지 1석 반이었고, 1930년대 초반의 경우 금전으로는 160원 내외로부터 30∼40원까지도 받았다.
농번기에 계절적으로 고용되는 경우는 비교적 많아서 약 3개월에 60∼70원의 보수를 받고 의식은 자비로 해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임금은 대단히 낮은 것으로 5∼10년의 머슴살이를 하고 한푼도 저축하지 못해 머슴으로 전전하는 자가 대부분이었다.
머슴이 오랫동안 고용주에게 봉사하여 신뢰를 얻는 등, 양자간에 온정적 관계가 이루어졌을 때에는 고용주는 머슴을 혼인시키고 약간의 토지 · 가옥을 마련, 독립시켜 주는 것을 도리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8·15광복 후에도 머슴은 존속되어 1950년에는 남한만 해도 27만578명의 머슴이 있었다. 더구나 6·25전쟁을 겪은 다음부터는 더욱 증가하였고, 1960년 통계에 따르면 21만9157호에 고용된 머슴의 수가 24만4557명이나 되었다. 이러한 고용농가는 전체 농가호수의 약 1할에 달하는 숫자였다. 따라서 1950년대를 통틀어 적어도 이 정도의 고용농가와 머슴이 상존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50년대 중반 31개 이(里)를 대상으로 한 머슴 고용 실태조사에 따르면, 노년층과 청소년의 머슴이 35% 정도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5년 미만의 경험을 가진 머슴이 60%였다는 점에서 1950년대 머슴 고용의 특성을 엿볼 수 있다.
머슴이 된 동기에는 고아와 무의탁, 흉년과 농촌경제의 파탄에서 비롯된 급박한 생계유지의 필요성, 고리대적인 채무변제, 그리고 그들이 ‘보은(報恩)’이라고 표현하는 온정주의적 예속관계 등이 있었다.
일단 머슴이 되면 계층의 상승 이동이 어려워 머슴 522명 중 15년 이상 머슴살이를 한 자가 35명이었고, 아버지도 머슴이었던 자가 198명이나 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머슴은 반세습적인 강제적 예속관계가 아니라, 철저한 경제적 수탈로 인해 상승이 좌절되었다고 할 수 있다.
머슴이 빈농에 고용되었을 경우에는 중농 이상의 가구에 고용된 머슴보다 노동의 강도 · 인간관계 · 생활형편 등의 면에서 상대적으로 열세에 있었다. 머슴은 대개 현물로 새경을 받았는데 상머슴은 3월 입가(入家) 때의 들새경이 1∼3석, 11월 퇴가(退家) 때의 날새경이 4∼6석이었다.
이 밖에도 식사와 의복을 제공받았다. 이러한 머슴 고용비용은 광공업노동자의 평균임금 수준에도 미달되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이것마저도 고용주의 계약 위반으로 근대적 문물에 접한 머슴의 반발을 샀다.
생활이 고달프고 희망이 적었던 머슴들은 노름과 술에 쉽게 빠져들었다. 그러나 1950년대의 머슴은 이전시대보다는 새경도 많아졌고 대접도 나아졌다고 한다.
이러한 머슴의 고용형태는 산업화가 시작된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 점차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새경도 광업부문과 비슷해졌고 제조업 부문보다는 휠씬 높아졌다.
그러므로 중농조차도 머슴 고용이 큰 부담이 되었다. 또한 머슴들도 약 절반 정도는 약간이나마 토지를 소유하였고 가족들도 있었다. 예컨대 벼 9석을 받는 머슴이 세대주일 경우에는 가족들 식량으로도 부족하였지만, 비세대주 머슴은 상당량을 저축할 수 있었다. 특히 머슴과 고용주의 관계는 평등해졌다.
호칭도 씨 · 서방 · 일꾼이 가장 많았다. 서방은 고용주의 나이가 많거나 머슴이 행세를 제대로 못하였을 때 쓰였다. 고용주 대다수는 머슴을 어렵게 대하였고 잔소리가 심하다고 나가는 머슴도 있었다.
머슴들 다수가 학교교육을 받았고, 30대 전후의 머슴들은 예외없이 군복무를 마쳤으므로 과거의 머슴처럼 굴욕적인 대우를 감수하기에는 그들의 의식수준이 너무 높아졌다. 이러한 변화의 근본적인 원인은 산업화였다.
그로 인해 농촌인구의 이농이 활발해져 머슴과 같은 농업노동력을 얻는 것도 쉽지 않았으며 임금이 계속 상승하였으므로 고용농가의 영농비를 압박하였다. 그러므로 머슴은 점차 사라져갔고, 순수한 농업임금노동자로서의 머슴이 이따금 있을 따름이다. 1960년대 이후 머슴 노동은 급감하였으며 70년대 말 이후 80년대에는 전체 농업 노동 가운데 0.6%를 차지할 정도로 미미해졌다. →고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