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본. 편자와 편찬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말미에 조식(曺植)의 한시가 있고 본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본디 우리 나라에는 목화가 없었는데, 고려 공민왕 때(1360년) 진주 사람 문익점이 사간원 좌정언으로 있으면서 봉사(奉使)로 원나라에 간 지 3년이 되는 가을 귀국할 때 길가의 밭에 눈송이같이 흰 꽃이 있어 이를 기특히 여겨 종자(從者) 김룡(金龍)으로 하여금 여러 개를 따오도록 하였다.
그러자 밭을 지키던 노파가 이르기를 이는 국가가 금하는 바로 외국인이 이를 절취한 즉시 자기도 같은 벌을 받게 된다고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가져온 것이다.
다음해 꽃밭에 이를 심었고, 그 뒤 성공하여 종자를 나누어 전국에 퍼뜨린 것이다. 그러나 목화씨를 어떻게 제거하고 실을 어떻게 뽑을지 모르던 차에 호승(胡僧)이 우리 나라 산천을 두루 다니며 구경하다가 문익점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의 집에 머물러 있던 중 홀연히 목화를 보고 울면서 고향에서 목화를 본 지 수년 만에 이국에서 번성하는 목화를 보니 자연 눈물이 난다고 하였다.
이에 호승으로부터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등을 배워 의복을 짜서 입게 되었으니, 문익점의 공은 태산이나 하해(河海)에 비길 만하다. 이러한 본문의 끝에도 조식의 한시가 있는데 그 내용은 문익점의 공이 백곡(百穀)을 처음 재배한 후직(后稷)의 공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익점이 처음 목화를 재배한 유전에 세운 기념비의 비문이 들어 있는데, 그 요지는 이곳은 문익점이 비로소 목화를 재배한 유전이며 그가 세상을 뜬 지 500여 년이 지난 이제 이 기념비를 세우면서 그의 공을 기리되 조식의 한시 ‘백성들에게 옷을 입히니 후직의 공과 같도다(衣被生民后稷同)’를 인용하면서 지방의 여러 선비들이 의논하여 이 기념비를 세운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약력란에는 문익점의 약력이 기록되고 사적란에는 “문익점이 봉사로 중국에 가서 목화씨를 가져왔고, 그의 장인 정천익이 이를 심었으나 처음 재배법을 몰라 마침내 한 나무밖에 남지 않았으나 3년째에 크게 잘 자랐다 하며, 그 유적지는 의성군 산운면 제오동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목화의 도입 내력과 그 가공법의 개발 경위를 밝히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으며, 농업기술사 연구에도 필요한 문헌으로 활용되고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