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승려 담징(曇徵)이 610년(영양왕 21)에 일본에 ‘연애(碾磑)’를 전해주었다는 기록과 고려시대 1276년(충렬왕 2) 충렬왕이 ‘수애(水磑)’를 구경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물레방아가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널리 제작되어 사용된 듯하다. 특히 관개용 양수기인 중국식 당수차와 일본식 왜수차에 대한 지식이 전해지고 보급하려던 시도들이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17~18세기 이후 수레바퀴를 이용한 물레방아라는 효율적 도정 기구의 개발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나오는 ‘ 수차’를 물레방아와 혼동하기도 하지만, 수차는 관개용 양수기, 물레방아는 도정용 기구[도정기, 제분기]로 엄연히 다른 기구이다.
떨어지는 물의 낙하 에너지를 이용하는 윗걸이 물레방아와 흐르는 물의 동력 에너지를 이용하는 아랫걸이 물레방아가 있다. 윗걸이 물레방아는 물이 낙하하면서 물레바퀴를 돌리면 바퀴 굴대에 달린 눌림대가 돌면서 주1 끝을 눌러 방아채 끝에 달린 주2를 들어 올리고 내리면서 주3 속에 있는 곡식을 찧는다. 보통은 물레바퀴 하나에 굴대 양쪽에 눌림대를 달아 두개의 방아채와 공이를 설치하였는데, 쌍방아 또는 양방아라 불렀다. 윗걸이 물레방아는 조선시대의 방아 중에는 효율이 제일 좋아 한 시간에 적어도 한 가마 이상의 곡식을 찧었다. 물레바퀴와 눌림대가 방앗간 외부에 설치되어 있는 것과 달리, 아랫걸이 물레방아는 방앗간 내부에 물레바퀴와 눌림대를 설치한다. 윗걸이 물레방아에 비해 에너지 효율은 적으나 물의 낙차가 크지 않지만 흐르는 물살이 센 곳에서 설치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물레방아는 하층의 농부 개인이 제작해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19세기의 역사 기록에 의하면 건립에는 많은 노동력과 재력이 들어서 양반 지주층이 주도해, 마을 단위로 계(契)를 결성해 노동력을 모아 건립하였다. 1850년대 경상도 단성현의 양반 지주인 김인섭 집안에서 건립한 물레방아는 건립에 1개월 이상 공사 기간에 적어도 300여 명의 인력이 동원되었다. 물레방아의 제작뿐만 아니라 방앗간 건물과 물을 담고 모으는 보(洑)의 수축 등에 많은 노동력과 재력이 들어갔던 것이다.
건립뿐만 아니라, 이후의 보수와 운영에도 큰 노력이 필요하였다. 지역의 세력가가 주도해서 건립한 물레방아는 전문 관리인을 두어 운영하였으며, 사용료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