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년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호는 정암(正菴)·난곡(蘭谷)·한동(韓東)·양하(養何)로, 어려서 홀아버지 민영억 슬하에서 성장하고, 한학을 수학했다.
1898년 전국을 유랑했으며 1899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어를 배워 후쿠오카[福岡] 동아어학교에서 교사로 지냈다. 1905년 3월 경무청 총순(總巡)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했다. 이해 4월 다시 임명되었다. 이후 승훈랑(承訓郞)·광제원장(廣濟院長)·궁내부 제일 회계담당·내무부 위생국장·궁내성 사무시시찰관 등을 역임했다.
1908년 5월 대한실업장려회를 조직했으며, 조직 확대를 위해 친일인물 이지용(李址鎔)과 함께 친일단체 대한실업협회(大韓實業協會)를 조직 부회장이 되었다. 동아개진교육회·제국실업회·정우회 등에 참여했으며, 합방운동을 주도했다. 1909년 친일단체 국시유세단 기관지 『대동일보』 사장에 추대되었으며 동아찬영회에도 참여했다. 1910년 1월 『시사신문』을 창간하고 대표가 되었으며, 일제강점 이후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었다. 3·1운동 이후 신일본주의를 표방하는 국민협회(國民協會)를 조직했으며, 이해 4월 1일 『시사신문』을 다시 발행, 사장에 취임했다. 이 시기 도쿄에서 조선인참정권운동을 전개하던 중, 1921년 2월 16일 일본 도쿄 帝國Hotel에서 유학생 양근환(梁槿煥)의 단도에 찔려 사망했다.
민원식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736∼758)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