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사학 ( )

근대사
개념
식민치하의 현실인식에 기초해, 일제의 식민사학에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한민족의 주체적인 역사상을 수립하고자 했던 민족진영의 역사학.
정의
식민치하의 현실인식에 기초해, 일제의 식민사학에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한민족의 주체적인 역사상을 수립하고자 했던 민족진영의 역사학.
개설

이 계열의 역사학은 한말 민족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국 근대사에서 제기되었던 반봉건(反封建)·반제국(反帝國)의 민족적·시대적 과제를 실현하는데 있어 역사학의 측면에서 기여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역사연구에서 민족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하더라도 학문방법이 근대적이지 못했다거나 일제와의 투쟁의식이 결여되었을 경우에는 이 계열의 역사학에서 배제하여야 한다.

연원 및 변천

우리나라에서 민족주의사학이라면 1910년대 이후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 등과 1930년대 이후의 정인보(鄭寅普)·안재홍(安在鴻)·문일평(文一平) 등으로 이어지는 갈래를 의미한다. 이들 모두는 일원론적 유심론을 지향하고 있다.

다원론적 입장을 취했던 황의돈(黃義敦)·장도빈(張道斌)·남궁억(南宮檍)·권덕규(權悳奎) 등의 경우는 연구가 진전되면서 이들을 민족주의사학에서 제외해, 별도로 문화주의사학 또는 문화사학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한편 역사연구 방법론을 기준으로 종래의 민족주의사학을 유심론사학으로 명명하기도 한다.

한말의 계몽주의적 역사서술은 비록 근대적 체재와 서술방식을 갖추었으나,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왜곡된 한국사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민족적 측면에 많은 한계를 드러내었다.

민족진영에서는 이러한 위기의 시기에 역사학에서 위기 극복의 방책을 찾으려고 하였다. 특히, 개화기 학부교과서에서 보인 식민성을 극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였다.

반일·반제국주의에 입각한 근대적 민족주의 역사학은 신채호의 『독사신론 讀史新論』(1908)에서 마련되었다. 신채호는 사론형식으로 발표된 이 글에서 한말 역사교과서에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던 식민논리를 구체적으로 비판하였다. 그리고 민족주의 역사학의 방법론과 주객족 개념에 입각한 새로운 고대사 체계를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 신채호는 왜곡된 한국사를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바로 잡는다는 목적의식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만 해도 그의 역사인식에는 사회진화론과 영웅중심사관의 성격이 강하였다.

내용
  1. 1910년대

1910년대 민족주의역사학은 대종교(大倧敎) 계열의 역사인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 발전하였다. 1910∼1920년대에는 박은식이 『한국통사(韓國痛史)』·『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신채호가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등을 집필하였다. 신규식(申圭植)도 이 시기에 『한국혼(韓國魂)』을 집필해 민족의 진로를 밝혔다.

박은식은 일제의 침략과정과 한민족의 투쟁사를 중심으로 역사를 집필해 우리 민족에게 국권회복의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박은식은 혼(魂)과 백(魄)의 대결구도 속에서 혼의 상징인 국사가 없어지지 않으면, 그 형체인 나라도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국혼론을 주창하였다.

그리고 3·1운동 과정에서 표출된 민중의 힘에 주목하고 이를 더욱 발전시켜, 세계민의(世界民意)를 통해 세계대동과 인류공존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평등주의론에 입각해 역사를 서술하였다. 더불어 서술형식에 있어서도 근대적인 서술체재를 갖추려고 노력하였다.

신채호는 역사 주체로서의 민족을 선명하게 부각시킴으로써 반식민주의적 관점을 분명히 해 주체적인 한국사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는 우리 민족 역사의 전개과정을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독특한 투쟁사관에 입각해 서술하면서 민족과 계급문제를 파악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부여·고구려 중심의 고대사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민족 고유의 사상으로 낭가사상(郎家思想)을 발견하였다. 또한, 서구의 근대적인 연구방법론을 도입해 독자적인 역사 고증방법론을 제시하였다. 신채호에 의해 제시된 역사이론과 연구방법론은 당시 우리 나라 역사학을 근대 역사학의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그 밖에 1910년대 역사학 연구에서는 김교헌(金敎獻)·이상룡(李相龍)·유인식(柳寅植) 등이 대종교와 유학의 바탕 위에서, 1920년대 연구에서는 황의돈·장도빈·권덕규·남궁억·계봉우 등이 문화주의사학의 바탕 위에서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을 보였다.

  1. 1930년대

한편, 박은식과 신채호의 역사연구는 1930년대 이후에 주로 활동했던 정인보·안재홍·문일평 등의 역사연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이전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원동력을 민족정신에서 구하려 애썼다.

이들은 이전 세대 민족주의 역사가들이 세워 놓은 기초 위에 많은 자료들을 활용해 고증적 측면을 보충하는 발전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새로운 과학적 연구방법을 도입해 역사 연구방법론을 꾸준히 개발함으로써, 민족정신을 구체성을 지닌 역사의식으로 변화시켰다.

정인보는 조선학운동을 통해 민족 학문으로서의 실학을 발견하고, 또한 고대사분야에서는 신채호의 주장을 계승해 더욱 자세히 고증하였다.

안재홍은 비교언어학이나 유물사관을 포함한 사회과학적 해석을 수용해 민족주의사학을 역사과학적 차원으로 높이려고 하였다. 문일평은 한국사 해석에 문화와 민중적인 요소를 가미하고 이를 신문과 잡지를 통해 알기 쉽게 설명함으로써 민족주의사학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1. 1940년대

1940년대에는 극단적인 일제의 전시체제 하에서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이 타계하거나 은거해 활동이 저조하였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장도빈이 은거생활 중 민족주의적인 측면을 더욱 강하게 마련하였다. 안재홍은 민족주의를 이론적으로 정밀하게 개발하고 있었다. 신진학자로는 홍이섭(洪以燮)이 과학연구를 통해 민족 문화의 발전과정을 살펴 민족주의 역사학의 새로운 장을 개척하고 있었다.

의의와 평가

민족주의사학에서는 역사의 원동력을 정신적인 것에서 구했기 때문에 사회발전을 역동적으로 파악하는 데는 한계를 보였다. 이들은 민족정신과 같은 관념적인 개념을 사용해 역사를 움직여 나간 힘으로 설명함으로써 낭만성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연구방법론에서도 세련되지 못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게다가 해방 이후 이데올로기 대립과 남북의 분단이라는 변화된 상황에서 이데올로기의 합일과 민족의 통일이라는 우리 시대의 과제에 새로운 방향 제시를 하지도 못하였다. 그 결과, 민족주의사학은 역사학계를 이끌어 가는 주도사상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이후 역사학분야에서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관련해 무비판적인 사실나열과 이데올로기 편향적 역사이론에서 벗어나 자유민주주의와 민족주의적 시각에 입각한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힘입어 현대민족주의사학의 새로운 방향 정립이 요구되기 시작하였다.

참고문헌

『현대한국사학사(現代韓國史學史)』(조동걸, 나남, 1998)
『한국민족주의역사학(韓國民族主義歷史學)』(한영우, 일조각, 1994)
『한국근대역사학(韓國近代歷史學)의 이해(理解)』(이만열, 문학과 지성사, 1981)
『한국사학(韓國史學)의 방향(方向)』(이기백, 일조각, 1978)
『민족(民族)과 역사(歷史)』(이기백, 일조각, 1971)
「우리나라 근대역사학(近代歷史學)의 발달(發達)」(1)-1930∼40년대의 민족사학(民族史學)-(김용섭, 『문학(文學)과 지성(知性)』 2권 2호, 1971)
집필자
박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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