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확인된 「박문수전」은 표기 언어를 기준으로 한글본과 한문본이 있고, 일반 필사본, 구활자본의 형태로 대략 5종의 이본이 존재한다. 한문본은 필사본 야담집인 『양은천미(揚隱闡微)』에 수록된 「박영성가장천신(朴靈城假粧天神)」이다. 한글본은 유일서관과 경성서적업조합본 등에서 구활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이 중에서 앞서 간행된 것은 한문본이다.
한문본은 「박영성가장천신」을 수록하고 있는 『양은천미』에 실려 있다. 『양은천미』의 편찬 연대는 1907~1919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구활자본은 대부분 1915년 이후에 간행된 것이다. 이를 근거로 한다면 한문본이 한글본보다 앞선다.
하지만 ‘암행어사 박문수’와 관련된 이야기는 조선 후기에 구비와 문헌으로 다양하게 전승되고 있기 때문에, 두 본의 관계는 앞으로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암행어사 박문수를 ‘박 공(朴公)’으로 등장시킨 신소설 「삼쾌정」과 「이몽선전」이 있다. 이 작품은 「박문수전」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한문본과 한글본의 선후 문제는 앞으로 이본을 추가로 발굴하고, 작품 형성에 대한 논의를 다각화하여 논의할 필요가 있다.
「박문수전」은 세 개의 삽화로 이루어져 있다. 제 1회는 ‘박문슈어가 구쳔동 인인을 신도(神道)로 다사린 일’, 제 2회는 ‘남궁로 군슈가 시비로 ○을 삼아 시집 보○ 일’, 제 3회는 ‘도 진국공이 평에 인정승천(人定勝天) 일’이다. 이 중에서 제 1회만 어사 박문수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조선 영조 때 ‘박문수’는 암행어사를 주1받고 전국을 암행하며 돌아다닌다. 한번은 충청도를 거쳐 무주 땅에 들어가 늦은 밤에야 덕유산에 이르렀다. 박문수는 하룻밤 유숙하기 위해 여러 집을 찾다가 한 노인이 젊은이에게 죽여 달라며 소리를 지르는 것을 목격한다. 이 노인과 젊은이는 부자지간이었다.
박문수는 그 연고를 듣는다. 사연인즉, 이 마을은 구씨와 천씨가 많이 살아 ‘구천동’이라 불리는데, 노인만이 유씨였다. 천 씨는 유 씨를 모함하여 유 씨의 며느리를 탈취하려 계교를 썼다. 계교에 빠진 유 씨는 며느리를 빼앗기게 되자 자신의 아들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박문수는 무주 관아로 출도(出道)해서 문제를 해결했다.
세월이 지나 박문수는 구천동을 다시 찾는다. 그러다가 옛날 유 씨 노인이 살던 곳에 커다란 기와집이 들어선 것을 보게 된다. 이처럼 기와집이 생긴 이유를 마을 사람들에게 묻자, 천 씨가 관아에 끌려간 뒤로, 모든 재산을 동네 사람들과 유 씨에게 나누어 주었고 이를 밑천으로 유 씨가 큰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는다.
어느 날 영조는 조정 신하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겪었던 특이한 경험을 말하게 한다. 이때 박문수는 구천동에서 자신이 겪었던 일을 말하고, 이에 왕을 비롯한 신하들은 크게 감탄하였다.
박문수는 암행어사와 관련된 이야기에 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역사적으로 확인되는 박문수의 암행은 1727년 영남별견어사 때였다. 별견어사는 영조 때 특별히 파견된 어사로, 백성을 편안하게 안심시키고 마을의 수령을 감찰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암행어사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영남별견어사로 파견된 박문수는 인사 · 세정 · 군정 · 형정 등에 대한 여러 개혁을 주도했다. 그리고 별견어사 업무지침〔節目〕에 의거하여 수령 41명을 조사하여 이 중에서 혐의가 있는 13명을 파직시켰다. 이러한 암행어사로서의 박문수의 행적은 이후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어 다양한 암행어사 관련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어사 박문수의 행적은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있다. 이때 박문수는 다양한 허구적인 사건을 해결하고, 죄인은 정당하게 징벌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제 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