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대한제국기 철도원감독, 평리원판사, 외부협판 등을 역임한 관료.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900년 주일특명전권공사를 지낸 뒤 1902년에는 철도원감독(鐵道院監督)과 수륜원감독(水輪院監督)을 겸했고, 이어 외부협판과 수륜원부총재가 되었다.
이듬해 평리원판사(平理院判事)를 거쳐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일본에 파견되었다. 다시 이듬해에 외부협판 · 철도원부총재 등을 지내고 궁내부협판이 되었다가 서리대신사무(署理大臣事務)로 승진했고, 비원부장(祕苑副長) · 제실제도정리의정관(帝室制度整理議定官)을 겸하였다.
1905년 박용화의 소청으로 단종조(端宗朝) 충신 충정공(忠貞公) 박심문(朴審問)의 신주를 영구히 사당에서 제사지내게 하는 부조지전(不祧之典)을 특별히 허용하도록 장례원(掌禮院)에서 복주(覆奏)하였다. 같은 해 태극장(太極章) · 팔괘장(八卦章) 등이 서훈되었고, 이어 중추원찬의(中樞院贊議) · 임시외부대신사무 · 제실회계심사국장 등을 지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때 구완희(具完喜) 등과 함께 일본군을 이끌고 왕궁을 포위해 고종을 협박하고 조약을 체결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듬해 조약체결의 공로로 태극장과 팔괘장의 훈장이 다시 주어졌다. 잠시 황해도관찰사로 외직에 있다가 시종원경(侍從院卿) · 표훈원총재(表勳院總裁)에 임명되었다.
1907년 제실회계심사국장에 재임용되고 이어 임시서리시종원경 겸 내대신사무에도 임명되었다. 이 해 4월 전 주서 나인영(羅寅永)을 비롯해 전 주사 오기호(吳基鎬) · 김인식(金寅植) 등이 박용화를 포함한 을사6적(乙巳六賊)을 처단하고자 1인당 3인씩의 자객을 보냈을 때 그 중 2인이 박용화의 집에 침입해 자상(刺傷)을 입혀 죽였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참고문헌
- 『고종실록(高宗實錄)』
- 『일성록(日省錄)』
- 『매천야록(梅泉野錄)』
- 『윤치호일기(尹致昊日記)』
- 임중빈, 『박용화전(朴鏞和傳): 고종황제와 한말정계』(일조각, 1989)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