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극은 1891년 러시아 연해주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나 1936년에 사망하였다. 1902년 올가 타우제미 마을로 이주하여 소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지방 관리의 추천을 받아 치타 신학교로 유학하였다. 크라스노야르스크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08년 귀향하여 마을 서기가 되었다.
박창극은 1909년 한인국민회에 가입하였다. 1915년 러시아 군대에 징집되어 이르쿠츠크에서 복무하였다. 1917년 러시아 2월혁명 이후 병사소비에트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부상으로 제대하였다. 1918년에는 올가 구역 조선노동자동맹 책임비서가 되었다. 시베리아 내전에서 혁명군이 밀리자 박창극은 아무르주로 옮겨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정치부 감독관으로 일하면서 치타군의 책임서기로 근무하였다.
1921년 8월 수이푼 구역에서 항일 의용 부대인 솔밭관〔松田關〕 공산주의 부대의 정치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에서 1924년까지 러시아공산당 수찬군당위원회의 조선분과장을 지냈다. 1924년 5월 고려공산당 창립준비대표회 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으며 당원교육사무를 맡았다. 1924년에서 1926년에는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집행위원회가 조직한 조선과의 전권위원, 러시아공산당 블라디보스토크위원회 산하에 민족정치국 주임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러시아공산당의 명령으로 모스크바의 스탈린 명칭 공급아카데미에서 공부한 뒤, 졸업 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어업 트러스트에서 일하였다. 1936년 탄압을 받아 사망하였고, 1956년에 복권되었다.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시에 있는 국립아르세니예프박물관에 박창극 관련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