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선장(善長), 호는 담옹(澹翁). 아버지는 가선대부(嘉善大夫) 박흥준(朴興俊)이며, 어머니는 풍기진씨(豊基秦氏) 진성수(秦聖修)의 딸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외조부 진업국(秦業國)에게 수학하였고, 이어 이동언(李東彦)을 따라 학문을 익혔다. 미포아문(米布衙門)에서 조보(朝報)를 담당하는 서리(胥吏)를 지냈는데, 1721년(경종 1) 신임사화가 발생하자 이듬해 임인년(1722)에 “요사이 조지(朝紙)의 소계(疏啓)는 그 내용이 더러워 쓰지 못하겠다.”하면서 그만두고 산사로 들어갔다.
지조가 굳고 여간해서는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았으며, 항간의 비리(鄙俚: 풍속·언어 등이 상스러움.)한 말은 입에 담지 않았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끼니를 잇기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부지런히 경전을 섭렵하여 높은 수준에 올라 있었다고 한다.
특히, 『주역』에 해박하여 독특한 괘도인 「원괘차서도(原卦次序圖)」와 「원괘방위도(原卦方位圖)」를 남기고 있는데, 자신의 경전에 대한 지식과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밖에 성력(星曆)·음률(音律)·지리·의복(醫卜)에 통달하였다.
육일옹(六一翁)이라는 사람은 그를 조선 전기 여항문인인 서기(徐起)와 송익필(宋翼弼)에 비유하기도 했으며,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일생을 ‘이인(異人)의 행적(行蹟)’이라고 평하였다.
그는 여항시인들이 활동했던 필운대(弼雲臺)와 북한산 기슭 등지에서 노닐었으며, 김원행(金元行)·유척기(兪拓基) 등 주로 노론계 인사들과 교유했다. 그의 문하에서는 시인 백윤구(白胤耉)·홍준해(洪準海)·윤득관(尹得觀) 등이 배출되었다. 저서로 『담옹집(澹翁集)』 3권 1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