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금성(錦城). 자는 유문(孺文), 호는 검암(儉巖). 중인출신.
가계와 생애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살았던 곳의 위치만 전해지는데, 아침마다 배오개시장[梨峴市]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 장안의 제2교(橋), 즉 광교(廣橋)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17, 18세 때에 문장으로 이름나 진신대부들 사이에 잘 알려져 있었고, 그들로부터 장자(長者)의 풍모를 지녔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여항시인인 김시모(金時模)·김진태(金鎭泰) 등과 교유하며 창작활동을 하였으며, 이밖에 최윤창(崔潤昌)·마성린(馬成麟)·백경현(白景炫) 등과 사귀었고, 손아래인 천수경(千壽慶)을 비롯한 이른바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구성원들과도 관계를 맺었다.
그가 18세 되던 해에 지은 시 「만음(謾吟)」 중에 “애석하다, 10년 동안 밑바닥 일만 이루었구나.”라고 한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학문을 하였으며 그의 의식은 양반계층의 그것과 다름없었음을 알 수 있다. 밑바닥 일이란 시문장을 지칭한 것이다.
음주를 좋아하고 성격이 소광(疎曠)하여 당시 이름 있는 시인들과 수창하였으므로, 그가 남긴 시작품의 다수가 수창시이다. 저서로 『검암산인시집(儉巖山人詩集)』 2권 1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