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1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출생했다. 서당에서 수학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무학이다.
1905년 대구의 병영에서 급사를 지냈다. 가난을 이기려고 일본으로 건너가, 고용살이와 자전거 직공, 탄광 갱부, 노무자 등으로 전전하다가 거물 폭력배로 성장하였다. 1917년 5월 나고야[名古屋]에서 조선인삼 판매업에 종사하다가 나고야조선인 회장에 취임했다. 이 시기 흑룡회 계열의 폭력배 거두 도야마 미쓰루[頭山滿]와 교류한 후, 1920년 도쿄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아 동경에서 상애(相愛)·공존공영 정신에 입각한 일선융화를 표방하면서 노동단체 상구회(相救會)를 조직하여 회장에 취임했으며, 1921년 상애회(相愛會)로 개편하였다. 상애회는 조선인 노무자의 교화·구제를 위하여 직업소개, 인사 상담, 공동숙박소 건설 등을 사업으로 표방했으나, 일본인 기업주 편에서 노무자를 학대, 압박한 폭력 착취단체였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노무자 300명으로 노동봉사대를 결성하고, 경시총감 아카치[赤池濃]와의 연락 아래 시체 처리와 조선인 노무자 색출 및 수용 등의 작업에 종사하였다. 1928년 상애회를 재단법인으로 확충하고, 전직 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鶴吉]를 재단이사장으로 영입하였다. 1924년 4월 지부격인 노동상애회를 서울에 조직하고 친일단체 각파유지연맹에 참여했다. 『동아일보(東亞日報)』가 각파유지연맹을 비난하자 송진우(宋鎭禹)를 납치해 폭행하였으며, 1924년 7월의 하의도(荷衣島) 소작쟁의에서도 농민층 청년회를 습격하였다.
1932년 도쿄 제4구에 입후보하여 일본 중의원의원에 당선되고, 이후에도 몇 차례 재당선되었다. 조선으로 드나들면서 춘만광산(春滿鑛山) 등 이권사업을 경영하였으며, 중일전쟁 이후 ‘동양 평화를 위하여’ 등의 황민화 시국강연을 하였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필승 체제 확립과 내선일체의 촉진을 목표로 야마토동맹[大和同盟]을 조직, 이사에 취임했으며, 시간극복대강연회(時艱克服大講演會) 등을 주최해 필승사상을 고취했다.
해방 50일 전인 1945년 6월 24일 ‘미영격멸’, ‘내선단결’, '생전필승'을 구호로 내걸고 대의당(大義黨)을 결성하고 당수에 취임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직전인 1945년 7월 24일 대의당이 주최한 아시아민족분격대회에서는 강윤국, 유만수, 조문기 등 세 청년이 장치한 폭탄이 터져 마지막 항일 사건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해방 후 일본으로 도피했으며, 도쿄 민단 중앙본부 고문을 맡았다. 1955년 6월 조국통일촉진협의회를 조직했으며 1957년에는 일한문화협회를 설립하고 상임고문을 맡았다. 1962년 도쿄에 있는 아세아상사의 사장으로 재직했다.
박춘금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8·11·13·14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304∼332)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1992년 '일한문화협회'에서 박춘금의 무덤 옆에 송덕비를 세웠으나, 2002년 송덕비와 묘는 파묘되어 철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