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물은 조선시대 지방관이 국왕에게 바치던 진상의 일종으로, 명일·행행·강무·칭경 진하 방물 등으로 구분된다. 이 중 국왕 행차와 강무 시 지방관이 바치는 행행 방물과 강무 방물은 조선 후기에 폐지됐다. 한편 중국 황제에게 바치는 진헌물도 방물이라 일컬었는데, 사행 시 황제·황후·황태자 등에 바치는 연례 방물과 사은사·주청사·문안사·진향사 등을 별도 파견해 바치는 별사 방물로 구분된다. 17세기 초 정묘호란을 계기로 조선은 청의 요구에 따라 세폐를 정기적으로 바쳐야 했으며 병자호란 이후로는 명에 바치던 방물 역시 청에 바치게 됐다.
방물은 지방관이 조정에 바치는 진상물의 일종 혹은 조선 국왕이 중국에 바치던 예물을 일컫는 말이다.
전자의 방물은 조선 전기 진상의 일종으로 왕실에 진배되었는데, 명일 방물, 행행 방물, 강무 방물, 칭경 진하 방물로 나뉘었다. 명일 방물은 정조와 동지, 국왕 및 왕비 탄생일 등 절기와 축일에 바치는 진상의 일종이다. 행행 방물은 선왕의 능침과 어진을 방문하거나 치료 및 휴식을 위해 지방에 나갈 때 해당 지역의 지방관이 문안 차 바치던 예물이다. 강무 방물은 국왕이 강무를 행할 때 각궁, 전우, 마구, 말, 매 등의 군수품을 진상으로 바치던 것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칭경 진하 방물은 원자의 탄생이나 세자의 가례 등의 왕실 경사에 의정부 · 육조 등 지방관이 바치던 예물을 말한다. 조선 후기에는 행행 방물과 강무 방물이 폐지되었으며, 명일 방물은 조선 후기에 들어 가죽류와 품질 좋은 종이, 비단실 등이 주를 이루었다.
후자의 방물은 중국에 사행을 갈 때 바쳤는데, 삼절사 때 가지고 가는 연례 방물(年例方物)과 임시 사행(臨時使行) 시 바치는 별사 방물(別使方物)이 있었다. 연례 방물은 황제 · 황후 · 황태자 등 방물을 바치던 대상에 따라 예물의 종류와 수량이 달랐다. 이와 관련하여 명으로부터 일정한 요구를 받은 기록은 확인되지 않지만, 조정에서 사행 때마다 품목과 수량을 논의해 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방물 품목에는 저포와 마포, 화려한 문양을 새긴 각종 방석과 인삼, 잡색마 등이 포함되었다. 별사 방물은 사은사 · 주청사 · 문안사(황제가 심양(瀋陽)에 올 때 문안하던 사신) · 진향사 등이 바치던 진헌물로써 사행 목적에 따라 각각 다르게 마련되었다. 대략적인 물품은 명주 · 모시 · 백면지(白綿紙) · 유둔(油芚) · 자리[席子] · 가죽류[皮物] · 어물(魚物) · 과실 · 후추 · 꿀 · 은자(銀子) · 왜장검(倭長劍) · 은향합(銀香盒) · 화룡촉(畫龍燭) · 황모필(黃毛筆) · 침속향(沈束香) · 유매묵(油煤墨) · 부용향(芙蓉香) 등이었다. 청나라 건국 이후 없어진 방물로는 검은 삼베 · 표피(豹皮) · 인삼 · 저마겸직포(苧麻兼織布) 등이 있었다.
사행 방물의 간품(看品)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호조(戶曹)의 당랑이 사신과 입회하여 방물의 품질을 살펴본 뒤 봉해서 싸고, 예조(禮曹)에서 날짜를 정해 낭청(郎廳)이 도당(都堂)에서 다시 한 번 품질을 검토한 후, 마지막으로 국왕이 직접 살펴본 후 봉해 싸서 바리[䭾]로 실어 보냈다.
한편 정묘호란(丁卯胡亂) 이후 조선은 명에 바치던 방물 외에도 매해 음력 10월에 막대한 공물, 즉 세폐를 청에 별도로 바쳐야 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중원을 장악한 청은 조선이 명에게 예를 표했던 방식 그대로 청에게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하면서, 세폐와 함께 방물도 바치도록 했다. 세폐는 방물과 달리 청의 강력한 요구로 이루어진 데다가 그 양도 많았다. 조선에 요구한 세폐, 방물 액수는 인조 대 50만냥에 달해 조정의 1년 수입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후 세폐, 방물은 점차 줄어드는 추세였지만 외교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재정 부담은 고스란히 백성에게 전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