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기(白頭山記)」는 조선 후기 홍세태(洪世泰)가 지은 백두산 기행문이다. 다만 작자가 자신이 직접 백두산을 답사하고 쓴 기행문이 아니라 '김경문(金慶門)'이라는 역관(譯官)의 말을 통해 들은 백두산 국경선 확정의 상황과 백두산의 지형 및 승경(勝景)을 관찰자적인 시점으로 기록하였다. 홍세태의 문집인 『유하집(柳下集)』 권 9에 수록되어 있다.
홍세태(洪世泰)의 문집인 『유하집(柳下集)』 권 9에 수록되어 있다. 작자가 직접 백두산을 답사하고 쓴 것이 아니고, ' 김경문(金慶門)'이라는 역관(譯官)으로부터 전해 들은 국경선 확정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그 사이에 백두산의 지형과 뛰어난 경치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백두산기」 첫 부분에서는 백두산과 청(淸)나라와의 문제가 있었음을 말한다. 이어서 김경문이 국경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역관으로 참여한 사실을 밝힌 다음에, 그가 자기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관찰자적인 시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부르는 백두산을 청나라에서는 '장백산(長白山)'이라 한다. 그런데 이 산으로부터 흘러 내려온 두 강을 가지고 국경을 삼아 왔지만 그 지역이 험하고 멀어서 제대로 경계를 알기 어려웠다. 1712년(숙종 38) 청나라의 목극등(穆克登)이 백두산에 표석(表石)을 세우기 위하여 파견된다는 통지를 받고, 우리 조정에서는 박권(朴權)으로 정계사(定界使)를 삼아 청나라 관원들과 함께 가서 경계를 결정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백두산 꼭대기에 올라 분수령을 찾아 사람 인자(人字)처럼 생긴 지형 가운데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고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행이 왕복한 거리는 약 2,000여 리로서 3개월의 시간이 소요되었다는 것이다.”
「백두산기」의 글 끝에 저자는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자신이 사마천(司馬遷)과 같은 필력을 발휘하지 못함을 아쉬워하였다. 역관 김경문을 장하게 여기면서도 또 한편으로 오랑캐 사신을 따라 직방(職方)의 역할만 수행한 것을 한탄스럽게 여기기도 하였다.
작자가 자신이 직접 백두산을 답사하고 쓴 기행문이 아니라, 역관 김경문을 통해 들은 백두산 국경선 확정의 상황, 백두산의 지형 및 승경을 관찰자적인 시점으로 기록하였다. 이러한 형식 자체만으로도 일반적인 기행문과는 변별점이 있으며, 또한 18세기 초반 청나라와의 국경 확정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백두산기」는 문장에 능했던 홍세태의 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기행문이다. 또한 필체의 유려함뿐만 아니라 기록 문학으로서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에 얽힌 역사적 사실을 검증하는 데에도 주목할 만한 자료이다. 즉 이 작품은 홍세태 작자의 문학적 역량을 확인하는 동시에 조선 후기 백두산의 국경 확정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