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충청남도 논산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수원(水原)이고, 호는 서진(曙津)이며 가톨릭 세례명은 알로이시오(Aloysius)이다. 충청남도 대전의 삼성학교를 졸업한 후, 1920년 3월 경성고등보통학교 본과, 1923년 3월 경성법학전문학교 본과를 졸업했다. 1923년 3월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 서기 겸 통역생으로 근무했으며, 1930년 사법관후보고시에 합격했다. 1933년 10월 판사로 임용되어 평양지방법원에 발령받았다.
평양지방법원 판사로 근무하면서 반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체포된 전복동 등의 재판과 의열단의 단원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된 이화순 등의 재판에 판사로 참여했다. 이후 1936년 6월 청진지방법원, 1940년 8월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의 판사를 지냈다. 1943년 6월 일본 정부로부터 서보장(훈6등)을 받았다. 1944년 3월 대전지방법원 강경지청 판사로 발령받아 해방 때까지 재직했다. 이 기간 동안에도 함경북도 및 함경남도 일대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활동하다가 체포된 사건 등의 재판에 판사로 참여했다. 또한 천황에 대해 불경한 언동을 한 혐의로 체포된 이수용의 재판과 일본인이 조선인을 총살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유포한 혐의로 체포된 강태호의 재판에도 판사로 참여했다.
해방 후, 1945년 11월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에 임명되었고, 1948년 10월 법무부 차관이 되었다. 1949년 6월 서울고등법원장, 같은 해 11월 대법원 대법관에 임명되었다. 대법관으로 재직하면서 1950년 4월 중앙선거위원회 위원, 1951년 7월 탄핵심판소 심판관, 8월 헌법위원회 위원을 겸직했다. 1953년 9월 내무부 장관에 기용되어 1955년 4월까지 재직했으며, 1954년 11월 국무총리 임시서리를 맡았다. 내무부 장관 시절 농촌잡부금 및 인사문제 등을 쇄신, 정리하는데 노력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종신 집권을 가능케 했던 이른바 사사오입개헌(四捨五入改憲) 당시 내무부 장관 및 국무총리 임시서리로서 국무회의를 개최해 사사오입이라는 논리로 부결된 개헌안은 가결된 것이라는 정부입장을 공포했다. 이로 인해 국무총리 서리 및 국무위원 불신임 결의안이 국회에 제출됐으나 모두 부결되었다. 내무부 장관 사직 후 이승만 대통령의 추천으로 1955년 4월 다시 대법관에 임명되었고, 5·16군사정변이 일어나자 1961년 6월 사임했다. 이후 서울에서 변호사를 개업하고 활동했으며, 1971년 10월 13일 사망했다.
백한성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5·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8: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35∼58)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