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奉祀)는 돌아가신 부모나 조부모 등의 조상에 대한 제사이다. 『경국대전』의 봉사법은 차등적 삼대봉사와 장자 승계를 규정한 남계·부계 중심의 가부장제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남녀윤회봉사 등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사대봉사, 적장자 단독 승계 등이 확립되었고, 이는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전통으로 각인되어 1960년 제정 민법에 호주제로 정착되었다. 호주제는 2005년 민법의 개정으로 2008년에 폐지되었다. 현재는 다양한 봉사 방식이 존재하며 남녀평등적인 15세기로 회귀하였다.
유교에서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중시하였으며, 조선시대에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은 양반의 중요한 덕목이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서는 관례(冠禮), 혼례(婚禮), 상례(喪禮)와 함께 제례(祭禮)를 사례(四禮)로 중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주자가례』에 근거하여 조선 특유의 봉사법제를 마련하였으며, 이후에도 『주자가례』를 실천하면서 이해하고 사회 변화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용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에 유교식 봉사가 수용된 시기는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이다. 1390년(공양왕 2) 2월에 『주자가례』에 따른 제례 절차를 규정한 가묘봉사법(家廟奉祀法)이 만들어졌고, 그해 8월에는 이를 보완하여 사대부가제의(士大夫家祭儀)가 제정되었다. 이 법의 내용은 가묘를 건립하여 적장자손이 그의 관직에 따라 3대까지 봉사하는 차등 봉사를 규정하였다. 장자의 집에서 제사를 모시며, 장자에게 아들이 없으면 뒤를 이를 양자를 세우는 입후(立後)를 하지 않고, 아우가 제사를 모시는 형망제급(兄亡弟及)을 규정하고, 그 결과 장자는 가계 계승에서 배제되었다.
고려 말기의 법제는 조선에 그대로 이어져 『경국대전』 예전 봉사(奉祀)조와 입후(立後)조에 반영되었다. 『경국대전』에서 규정하는 봉사는, 『주자가례』의 사대봉사와 다르게 자손의 관직에 따라 문무관 6품 이상은 3대인 증조부모까지, 7품 이하는 2대인 조부모까지, 평민은 1대인 부모만 제사를 받들도록 하여 차등 봉사를 규정하였는데, 이는 예제(禮制)에서 차등을 반영한 것이다. 봉사자인 증손이 사망하여 증조부모의 신주를 묘소에 매안(埋安)해야 하는 친진(親盡) 또는 대진(代盡)의 경우에는 다른 증손 가운데 최연장자가 제사를 모셨는데, 이를 최장방천조(最長房遷祧)라고 한다. 다만 공신(功臣)은 가묘에서 영구히 제사를 받았는데, 이를 불천위(不遷位)라고 한다. 장자에게 아들이 없는 경우에 중자가 제사를 모시는 형망제급을 규정하였고, 중자도 그러하면 첩자(妾子)가 제사를 모셨고 첩자마저 없으면 입후하도록 하였다. 입후는 장자만이 할 수 있으며 중자는 장자의 제사에 덧붙여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는데 이를 부제(祔祭)라고 한다.
적자와 첩자가 모두 없어야 입후를 할 수 있는데, 그 대상은 같은 부계 혈족, 즉 동종(同宗)의 지자로 조카 항렬, 즉 소목지서(昭穆之序)에 합당한 남자였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봉사는 부계 · 남계자손이 제사를 승계하도록 규정하여 가부장제 이념을 반영하였다. 그러나 16세기까지 현실은 법과는 달랐다. 장자가 단독으로 제사를 지내지 않고 모든 아들딸들이 제사를 모시는 윤회봉사(輪廻奉祀)가,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딸과 외손이 제사를 지내는 외손 봉사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첩자의 봉사권은 명종대에는 강하게 보호를 받았지만, 후대로 갈수록 제약을 받아 조선 후기에는 아주 예외적으로만 인정되었다. 16세기에 사대봉사를 규정한 『주자가례』와 차등적 삼대봉사에 대한 국전(國典)의 전례 논쟁에서는 차등 봉사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보편적 삼대봉사가 허용되었으며, 예학(禮學)의 발달로 17세기 이후에는 보편적 사대봉사를 긍정하였다. 이는 예제상에 있는 차등을 부정한 것으로 역사의 발전이다.
경제적 상황이 달라진 조선 후기에는 제자녀윤회봉사가 사라지고 적장자단독봉사로 바뀌었다. 제자녀윤회봉사는 재산의 남녀균분상속(男女均分相續)과 혼인 후 남자가 처가살이를 하는 솔서혼속(率壻婚俗)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주자가례』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맞이하여 혼례를 거행하는 친영례(親迎禮)를 규정하였는데, 16세기에 전통 혼속과 타협하여 혼인 후 남자가 일정 기간 처가에 거주하다가 본가로 돌아가는 반(半)친영례가 등장하여 지속되었다. 이에 따라 친손와 외손을 차별하는 내외(內外) 관념이 생겨 상속에서 딸들은 아들보다 재산을 적게 상속받고, 그 대신에 제사 승계에서 배제되어 제자(諸子)윤회봉사가 나타났다. 『경국대전』 형전 사천(私賤)조에는 남녀균분상속을 규정하면서 제사 승계자인 승중자(承重子)에게는 중자녀(衆子女)보다 5분의 1을 더 주도록 하였는데, 이를 봉사조(奉祀條)라고 한다. 제자녀윤회봉사에는 제사를 책임지는 자손이 없어서 소홀히 할 우려가 있다. 그래서 법의 봉사조를 활용하여 재산 상속에서 장자를 우대하고 그 대신 제사를 장자가 단독으로 승계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주자가례』에서 상정한 제사의 장자 단독 승계가 실현된 것이다. 즉 봉사자는 제사를 단독으로 승계하고 재산 상속에서 우대받으며 조상을 잇는 후손으로 가문, 나아가 종족 통합의 구심점으로 존중받았다. 이러한 조선 후기의 봉사자의 지위는 식민지 시기에 법적으로 강화되어 1960년 제정 민법의 호주(戶主)로 이어졌다. 호주제는 2005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 및 민법의 개정으로 2008년에 폐지되었다. 2008년 대법원 판결에서는 전통적 봉사 관행을 부인하고 당사자의 합의, 적서와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딸과 서자에게도 봉사를 허용하였다(2008.11.20. 선고 2007다27670 전원합의체 판결).
『주자가례』에서는 사계절의 중간달인 사중월(四仲月: 음력 2·5·8·11월)에 지내는 시제(時祭)를 가장 중시하였고, 기타 조상의 사망일에 지내는 기일제(忌日祭), 친진한 조상에 대한 묘제(墓祭), 시조에 대한 봉사를 인정하였다. 조선에서는 기일제와 묘제를 가장 중시하였으며, 『주자가례』의 시제는 명절제에 흡수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적장자단독봉사가 일반적이었지만, 제사의 윤회봉사 내지 분할봉사는 1970년대까지 강원도 산간 지역에 존재하였는데, 이는 제사 거행의 경제적 부담을 분산시키려는 생존 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제사는 허례허식으로 치부되어 1973년에 제정된 「가정의례준칙」에서는 봉사하는 조상의 범위를 2대인 조부까지 한정하고, 또 제사의 종류도 기제와 추석에 모시는 절사(節祀) 및 정월 초하루에 모시는 연시제(年始祭)로 제한하였다. 그러나 의례를 법으로 규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재 기독교의 보급 등으로 봉사가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다. 가정의 상황에 따라 고조부모에서 부모까지 봉사하며 아들은 물론 딸들도 봉사하고 있다. 봉사는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으로 사회의 변화에 따른 변천을 인정해야 한다. 현재의 봉사는 남녀평등적인 모습의 15세기로 회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