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내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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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부가 동일한 후손들이 만든 친족 집단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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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당내친(堂內親)은 고조부가 동일한 후손들이 만든 친족 집단을 이르는 말이다. 이는 『주자가례』의 사대봉사와 친족 범위를 나타내는 오복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에 당내친이 자리 잡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부계만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상으로는 당내친의 개념이 존재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조선 후기에 사대봉사가 확산되어 부계 친족 집단이 형성되면서 당내친이 확립되었다. 이는 현재까지 일반적 친족의 범위로 규정되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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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조부가 동일한 후손들이 만든 친족 집단을 이르는 말.
내용

개인은 혈연 및 혼인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를 친족이라고 한다. 친족은 혈연으로 이어지는 혈족, 혼인으로 이어지는 인척(姻戚)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혈족은 다시 부계친인 친가와 모계친인 외가로 구분할 수 있다. 친족의 범위는 무한히 확장될 수 있으므로 관념상으로나 제도적으로 제한해야 하며, 그 기준은 친족 사이의 친소 관계이다. 다만 이 역시 주관적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기준이 필요하다.

우리의 친족 범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중국의 복제(服制)이다. 오복(五服)은 본인과 망자의 관계에 따라 상복(喪服)의 종류와 기간을 통하여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도록 한 것이다. 『주자가례』와 『대명률』에서는 “1) 참최(斬衰) 3년, 2) 자최(齊衰) 3년 · 장기(杖期) · 부장기(不杖期) ·5월 ·3월, 3) 대공(大功) 9월, 4) 소공(小功) 5월, 5) 시마(緦麻) 3월” 등이다. 가부장제를 반영하여 친가와 남계를 우선하여 복을 무겁게 하였다.

오복은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사대봉사와 일치한다. 『주자가례』에서는 가묘(家廟)에서 고조까지 사대만 봉사하고 그 이상의 조상은 가묘 또는 사당에서 나와 1년에 한 번 묘에서 제사를 지내라고 한다. 이를 친진(親盡) 또는 대진(代盡)이라 하며, 그 제사를 묘제(墓祭)라고 한다. 오복에서 가장 먼 친족인 시마친은 4대조인 고조의 후손이다. 중국의 부계 친족을 우리의 촌수로 대입하면 시마친은 8촌으로 같은 고조의 후손이며, 고조를 위한 제사 공동체인 고조종(高祖宗)을 형성하게 되면 이것이 당내친이다. 소공친은 6촌으로 같은 증조의 후손으로 증조종(曾祖宗)을, 대공친은 4촌으로 같은 조부의 후손으로 조종(祖宗)을, 자최 1년은 기복친(朞服親)이라고 하는데 형제이며, 이들은 예종(禰宗)을 구성한다. 참최친은 부모이다. 시조를 잇는 대종(大宗)과 고조종 이하 예종까지 각기 다른 층위의 부계 친족 집단이 존재하게 된다.

『경국대전』은 『주자가례』와 『대명률』에 따라 예전 오복에 친족 범위를 규정하면서 전통을 고려하여 외친과 처친에 대한 복을 중국보다 무겁게 규정하였으며, 이것이 일반적 친족 범위로 인정되었다. 하지만 상피(相避)나 분경금지(奔競禁止) 그리고 상속인의 범위 등에 대해서는 개별적으로 정의하였다. 실제 생활에서는 고려의 전통을 이어서 부계친과 모계친을 차별하지 않고, 대개는 4촌에서 6촌까지를 친족으로 여겼다.

당내친이라는 개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부계 친족 집단이 결성되어야 가능하며, 부계 친족 집단은 그 구심점인 공동 조상의 존재와 현창이 있어야 가능하다. 조상 현창은 망실된 분묘의 발견과 제사의 지속으로 수행되었다. 16세기 후반의 보편적 삼대봉사를 거쳐 17세기 이후에는 사대봉사가 일반화되었다. 이로써 당내친 형성의 예제적이며 이론적인 기반이 갖추어졌다. 조선 후기 두 차례의 전란으로 향촌 사회는 피폐해졌으며 노비제의 붕괴와 농지의 황폐화로 양반층의 경제적 기반이 약해졌다. 전후의 사회 변동으로 향촌 사회에서는 재지(在地) 세력 사이에 주도권 다툼이 발생하였으며, 경제적 기반과 함께 공동 조상의 위상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조선 전기의 솔서혼속(率壻婚俗)에서 반친영례(半親迎禮)로 이행하여 부계 친족 집단이 형성될 수 있는 예속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또 조상의 제사를 중시함에 따라 재산 상속에서 적장자가 우대를 받아 딸과 중자들은 배제 내지 차별을 받았다. 제사 등에서 부계 조상과 남계 후손을 중시함에 따라 재산 상속의 관행도 장자와 장손 중심으로 변하였다. 즉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은 제사용 재산인 봉사조(奉祀條)로 장자와 장손에게 물려주고, 재주(財主)가 직접 형성한 재산만 자녀에게 물려주었으며, 또 근처의 토지는 아들에게, 먼 곳의 토지는 딸들에게 주었다. 이렇게 해서 부계 후손들이 집단으로 거주할 수 있는 동성 촌락이 형성될 수 있었다. 동일 지역에 거주하는 후손들은 자연히 복제와 사대봉사에 따라 같은 고조의 후손들이 결집하게 되었고, 이들은 스스로를 당내친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당내친 결속의 일차적인 구심점은 공동 조상인 고조를 비롯한 조상 제사이다. 사대봉사를 거행하려면 기제(忌祭)는 최소한 8회이며, 여기에 네 번의 명절 제사와 묘제까지 포함하면 제사는 12회 이상으로 경제적 부담이 매우 크다. 이를 종손에게 모두 맡길 수 없으며, 혹 종손이 가난하여 제사를 제대로 거행하지 못하면 가문의 위상에 치명적이다. 제사를 안정적으로 지속하기 위해 후손들은 제사를 위해 별도의 재산을 마련하였는데, 이를 ‘ 위토(位土)’, ‘제위토’라고 하였으며, 형성 과정과 이에 따른 소유 형태는 다양하지만 제사를 주재하는 종손이 비록 소유자는 아니어도 관리는 하였다. 이로써 기일제는 물론 묘제, 나아가 시조제까지 안정적으로 지속됨에 따라 당내친의 결속이 강화되어 갔고, 이에 따라 거주 지역을 넘어서 도나 전국적 단위에서 친족 조직의 결성이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가묘에서 영구적으로 제향을 누리는 불천위(不遷位)에 대한 제사는 일족의 범위를 넘어서 지역 단위의 행사였다. 이를 계기로 광범위한 지역을 단위로 친족 결합을 도모하였다. 향촌에서 족세를 과시하기 위해서는 다른 지역으로 나아가야 했으며, 중앙과의 연결은 필수였고, 친족 여부를 확인하는 족보의 간행은 그 전제였다. 제사를 통한 친족의 결합과 족보를 통한 혈연의 확인은 문중 내지 종중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었다.

『주자가례』의 사대봉사와 오복제에 근거한 같은 고조의 후손으로 구성된 당내친은 친족 결합의 혈연적 바탕을 이루었고, 공동 조상에 대한 제사는 구심체의 역할을 하였다. 제사 공동체는 그 존속을 위해 위토를 형성하여 물적 기반을 축적하였고, 나아가 전국적 단위에서 친족 집단, 즉 문중 내지 종중의 성립이 가능하게 하였다. 이는 조선 후기 사회의 특징인 동성 촌락 형성의 직접적인 계기이며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당내친은 법으로도 인정되었는데, 1905년에 제정된 『형법대전(刑法大全)』 제62조에서는 친족의 범위를 오복, 즉 당내친을 바탕으로 규정하였다. 식민지 시기에는 이에 근거하여 관습상 친족의 범위를 당내친으로 설정하였다. 1960년 『제정민법』 제777조는 친족을 “8촌 이내의 부계 혈족, 8촌 이내의 부(夫)의 부계 혈족”으로 규정하였다. 『제정민법』의 친족 규정은 부계친과 모계친, 남녀를 차별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아 1990년 “8촌 이내의 혈족”으로 개정하여 부계친과 모계친을 평등하게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는 친족의 범위를 지나치게 확대한 것으로 현실과 법 감정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다. 민법의 친족 범위는 일반적 범위를 규정한 것으로 개별법에서는 별도로 규정하여 당내친이라는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입법하였다.

당내친은 4대조인 고조를 중심으로 형성된 혈연적 친족 집단인데, 혈연에 바탕을 둔 친족 집단은 배타성을 띠기 쉬우므로, 다문화 사회를 표방하고 살아가는 현재에는 현대적 의미를 다시 파악해야 한다.

참고문헌

원전

『경국대전』
『대전회통』
『주자가례』
『형법대전』

단행본

김두헌, 『한국가족제도연구』(서울대학교, 1980)
최재석, 『한국가족제도사연구』(일지사, 1983)
문숙자, 『조선시대 재산상속과 가족』(경인문화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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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긍식, 『조선시대 제사승계의 법제와 현실』(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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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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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명호, 「고려의 오복친과 친족관계 법제」(『한국사연구』 33, 한국사연구회, 1981)
이종서, 「조선전기와 후기의 혈연의식의 비교-'族' 관련 용어와 권리의무관계를 중심으로」(『한국문화』 58,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문화연구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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