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사는 세조의 능침인 광릉(光陵)의 원찰로 그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와 아들 예종에 의해 1469년에 창건되었으며, 같은 해 7월에 동종이 주조되었다. 왕실 발원으로 제작된 대형 범종으로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종의 형태와 장식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유입된 중국의 양식을 따랐는데, 신라와 고려로 이어지는 전통 범종의 특징과는 구별된다. 단룡의 종뉴와 음통을 갖춘 전통형에 비해, 봉선사 동종은 두 마리의 용으로 고리를 만들었고 음통은 없다. 또한 외래형 동종과 마찬가지로, 몸체 중심에는 횡대를 둘러 공간을 상하로 구획하였다.
상단에는 연곽과 보살상을 번갈아 배치하였다. 4구의 보살상은 두 손을 가슴에 모은 합장인(合掌印)을 취하고 연화좌 위에 서 있다. 몸을 한쪽으로 비스듬하게 돌린 채 우아한 자태를 보여주는데, 불화에 그려진 것처럼 늘씬한 신체 비례를 갖추었고 보관과 영락이 화려하게 묘사되었다. 보살의 두광 좌우에는 ‘ॐ(옴: 산스크리트어로, 불교 진언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으로 여겨지는 신성한 음절)’자를 새겼고 연곽 아래에는 옴마니반메훔의 육자대명왕진언( 육자대명주)을 써 놓았으며, 하단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하대는 종의 구연부에서 위로 올라온 위치에 있고, 물결이 일렁이는 듯한 파도문이 시문되었다.
동종의 하단에 양각으로 새긴 기록을 통해, 조성 연대를 비롯한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있다. 세조가 승하한 이후 명복을 빌기 위해 예종 원년인 1469년에 봉선사를 짓고 종을 만들었으며, 하루 여섯 차례씩 종을 쳐서 중생을 구제하고자 염원하였다. 명문은 강희맹(姜希孟)이 짓고 글씨는 정난종(鄭蘭宗)이 썼으며, 주종장은 정길산(鄭吉山)이다. 화원인 이백련(李百連)과 김중경(金仲敬)도 종의 제작에 참여하였다. 기본적으로 중국의 범종 양식을 따르면서, 연곽이나 보살상의 표현처럼 전통적 요소도 가미되었다. 이러한 특징은 조선 초기에 주성된 동종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왕실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대형 동종으로, 최고 장인의 솜씨가 발휘되었고 세부 장식에는 화원이 참여하여 완성도를 높였다. 보존 상태도 양호하고 제작 시기를 비롯한 조성 연유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점도 중요하다. 조선 초기 금속공예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