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5월 일제의 단말마적인 탄압정책과 수탈에 대항하기 위해 20세 안팎의 조문기·유만수(柳萬秀)·강윤국(康潤國)·우동학(禹東學)·권준(權俊) 등은 서울 관수동유만수 집에서 비밀결사 대한애국청년당(大韓愛國靑年黨)을 조직하였다. 이들 애국청년당원들은 일제의 고위간부나 친일파를 제거, 민족의 정기를 드높이고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마침 친일파의 거두 박춘금(朴春琴)이 대의당을 조직하고 일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함과 동시에 태평양전쟁에서 아시아민족의 전쟁 수행을 강조하기 위해, 7월 24일서울 부민관에서 아세아민족분격대회를 개최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이들은 대회에 참석하는 일제 고위간부와 친일도배들을 한꺼번에 폭사시키고자 부민관대회장의 폭파계획을 수립하였다.
애국청년당원들은 수차에 걸친 비밀회의를 통해 폭파계획에 만전을 기하며, 유만수가 서울 수색변전소(水色變電所) 작업장에서 입수한 다이너마이트를 가지고 폭탄 2개를 제조하였다. 이렇게 만든 사제폭탄 2개를 휴대하고 대회 전날 밤 자정이 지난 뒤, 부민관 뒷담을 넘어 부민관에 들어가 무대 뒤에서 화장실로 통하는 통로에 폭탄을 장치하고 거사시간만 기다렸다.
24일 저녁 주최자인 박춘금을 비롯해 조선총독·조선군사령관 등 일제 총독부 고관과 중국측 대표 정원간(丁元幹)·정유간(鄭維幹), 만주국 대표 강춘전(康春田), 일본측 대표 다카야마(高山虎雄) 및 국내 친일파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대회가 진행되었다. 주최자인 박춘금이 등단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위한 매국매족의 궤변을 토하고 있던 순간, 요란한 폭음소리와 함께 장내가 수라장으로 변하였다. 대의당원 한 사람이 폭탄 선을 잘못 건드려 예정보다 빨리 폭발하였던 것이다.
비록, 침략자와 그들의 주구들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회의 자체를 좌절시키고 독립을 열망하던 대한인의 기개를 다시 한 번 과시한 사건이었다. 이 폭음에 놀란 일본 경찰은 황급히 모든 문을 잠그고 범인을 찾기에 혈안이 되었으나, 조문기 등 애국청년당원들은 이미 그 자리를 피해 붙잡히지 않았다.
이 의거는 8·15광복을 불과 20여 일 앞두고 강행된 쾌사로서,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강력하게 표현한 민족독립운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