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및 고려시대에 많이 설치되었으며 사경소라고도 함.
통일신라시대의 예로는 최근 발견되어 1979년 국보로 지정된 호암미술관 소장의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권1∼10, 권44∼50 등 2축의 발문 조성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사경은 화엄사가 창건된 해인 754년(경덕왕 13)에서 755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지작인(紙作人)과 경필사(經筆師)는 무진주(武珍州)와 완산주(完山州)의 전라도 사람이고, 화사(畫師)나 경심(經心)을 만든 사람과 경의 제목을 쓴 사람은 대경인(大京人), 즉 경주 사람이다.
이러한 사실은 연기법사(緣起法師)가 화엄사에 임시 사경소를 설치하고 전라도 쪽에서 12명, 서울에서 7명을 초청하여 만들었던 것이다.
서울의 사경소에서 초빙한 사경사는 국찰인 황룡사의 고승이자 화엄종의 저명한 조사(祖師)였으며, 그들의 최고수준이 화엄경 제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 사경은 국가적인 사업이 아니고 연기법사의 개인적 발원이었으며, 전라도 화엄사에서 사경 제작이 이루어진 점은 주목된다.
고려시대에도 많은 양의 사경이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이로써 사경원 또는 사경소가 설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등의 기록에 의하면 왕이나 왕실 또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찰이 많이 창건되었고, 선왕이나 선비의 명복 등을 빌기 위해서 거금의 비용을 들여서 사경을 조성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즉 1101년(숙종 6)에 왕이 일월사(日月寺)에 행차하여 금자묘법연화경(金字妙法蓮華經)의 완성을 경축한 사실, 1157년(의종 11)에 흥왕사(興王寺)에서 의종과 왕비 김씨가 원자가 태어나기를 빌고, 태어나자 금은자화엄경(金銀字華嚴經)을 제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1312년(충선왕 4)에는 왕이 궁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고 민천사(旻天寺)에서 모후(母后)를 추모하기 위하여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을 썼다는 기록이 보인다. 즉 왕실의 지원을 받은 사찰인 흥왕사·민천사·일월사 등에서 사경이 사성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또 다른 사실은 구체적인 장소는 밝히지 않고 사경원·사경소라는 기록만을 볼 수 있다. 1181년(명종 11)에 사경소에 불이 났다는 기록과 염승익(廉承益)이 그의 집 일부를 희사하여 대장사경소를 만들었다.
충렬왕과 충숙왕 및 충선왕 때에 금자원(金字院)과 은자원(銀字院)에서 국왕의 발원에 의한 사경이 제작된 기록과 함께 전해오는 유물로 보아 사경소가 있었던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경제작에도 불구하고 사경소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즉 사경소가 언제부터 어떤 규모로 어떤 장소에 설치되었는지 등은 새로운 자료의 출현 없이는 단정지을 수 없다.
국가의 환란을 극복하고자 국가적인 대사업으로 대장경판을 만들고 대장도감(大藏都監)이 설치된 데 비하여, 사경의 사성에는 선왕 또는 선비를 추모하고, 또 후사를 잇게 해달라는 왕실의 개인적 소망이 담겨 있다. 사경소는 국가적인 기구가 아닌 왕실의 원찰(願刹)에서 국왕의 명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