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당시에 간행되지 않고 1749년(영조 25)에야 비로소 교서관(校書館)에서 간행되었다.
선조는 처음 유희춘(柳希春)에게 그 언해를 명하였으나, 유희춘이 당시 홍문관부제학 이이를 천거하였으므로 선조가 이이에게 구경(九經)을 언해하도록 명하였다.
그는 1584년(선조 17) 죽을 때까지 사서 언해의 초고만을 이루어놓았기 때문에 선조는 교정청을 설치하고 계속 그 일을 진행시켜 1590년경에 사서의 언해만을 완료, 간행하였다. 이 전질은 도산서원(陶山書院)에 있다.
그 뒤 임진·병자 양란으로 중단되었다가 1601년부터 다시 시작되어 1606∼1612년 사이에 사서삼경의 관찬본이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관찬본과 지방본이 여러 차례 간행되었지만, 영조조에 이르러 이재(李縡)가 이이의 후손 이진오(李鎭五)에게 시켜 가전본(家傳本)·수필본(手筆本)·등본(謄本) 등을 수집, 정사(淨寫)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749년 홍계희(洪啓禧)의 조력을 받아 간행되었다.
활자본. 『대학율곡언해』·『중용율곡언해』는 각각 1권 1책이며, 『논어율곡언해』는 4권 4책, 『맹자율곡언해』는 7권 7책이다. 규장각도서에 소장되어 있으며, 1973년 성균관대학교와 1984년 홍문각(弘文閣)에서 각각 영인한 바 있다.
이 책의 토(吐)나 석(釋)은 관찬본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정확(精確)하여 관찬본에 끼친 영향이 컸으며, 특히 일원성(一元性)을 주장하는 이이의 철학적 배경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한문으로 된 본문 뒤에 각각 언해를 붙이고 각 한자에는 모두 그 음(音)을 달아놓았다. 국어자료로서 취급할 때에는 이이의 국어생활을 감안해야 하기 때문에 16세기 국어의 영향을 전제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표기법에 나타나는 합용병서(合用竝書)는 ‘ㅂ’계와 ‘ㅅ’계가 있을 뿐 ‘ㅄ’계는 보이지 않으며, 각자병서(各自竝書)도 ‘ㅆ’과 ‘ㄸ’이 쓰인 정도이다. 말음 ‘ㅅ’과 ‘ㄷ’은 매우 혼란된 상태를 보인다.
어중의 경음화나 유기음화는 근대국어의 양상을 그대로 보이고 있으며, 구개음화는 몇몇 ㄷ계통의 것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강세첨사 ‘-ㅿㅏ ’는 ‘-사’, ‘-아’, ‘-야’와 같이 나타나며, ‘몯ᄒᆞ-’는 ‘몬ᄒᆞ-’와 공존하고 있다.
제1음절의 ‘·’음은 유지된 상태로 나타나며, 원순모음화현상도 보이고, 근대국어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ᄒᆞ여곰∼ᄒᆡ여곰’, ‘구ᄐᆞ여∼구ᄐᆡ여’, ‘ᄀᆞᆯᄒᆞ 여∼ᄀᆞᆯᄒᆡ여’, ‘ᄒᆞ이고∼ᄒᆡ이고’ 등도 나타난다.
반면에 ‘몯거이다, 몯게라’, ‘-두곤, -도곤’, ‘-가’(의문형 첨사) 등의 등장은 매우 보수적인 성격을 보인 것이다.
이 책은 번역상 관본에 비해 한자어를 원전 그대로 사용하였고, 이론적인 고려가 짙으며, 특히 당위법과 같은 서법을 주로 사용하였다.